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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 무덤 양식 보면 건국 정치역학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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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면

서울 석촌동 고분군 내 3, 4호분 전경.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한성기 최고지배세력 묘지다. 1916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는 적석총과 봉토분을 합쳐 89기 고분들이 확인돼 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시작된 강남지역 개발사업으로 인해 수많은 고분들이 파괴됐고 일부만 발굴됐을 뿐이다. 그 가운데 대형 고분 5기를 비롯한 고분 8기가 고분공원을 형성하고 있다. 현지에서는 이 일대를 오봉산이라 부르는데 오봉은 대형 고분 5기를 가리킨다.

서울의 백제 유적들은 강남지역 개발사업뿐 아니라 잦은 한강 범람으로도 파괴됐다. 길이가 50m에 달하는 석촌동 3호분은 한강 범람을 피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고분 위에 판잣집들이 세워져 마을을 이뤘으며 고분 일부는 건축용 골재로 채취된 바 있다. 석촌동 4호분은 74년 조사 시 퇴적된 토사에 묻혀 고추밭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서울로 확정되고 올림픽공원 주변 도로가 정비되면서 석촌동 3호분이 크게 파괴됐다. 3호분과 4호분 사이를 지나던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백제 한성기를 대표했던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3호분이 이렇게 파괴되자 무리한 개발사업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하지만 대책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 도로는 올림픽공원 주변의 중요한 도로라서 확장이 불가피하지만 3호분과 4호분 사이가 좁기 때문에 고분을 훼손하지 않으면 4차선으로 확장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도로는 4차선 확보를 위해 지하차도로 바뀌게 됐다. 83~84년에는 파괴된 3호분 정비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이뤄지는 한편 86년에는 지하차도 공사 범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항구적인 보존을 위해 이 일대 1만7000여 평을 백제고분공원으로 조성하게 됐고 87년 공원부지 전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지게 됐다.

석촌동 고분군은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과 함께 수준 높은 백제 국력과 문화를 잘 보여주는 한편 문헌에 기록되지 못한 백제 건국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2세기 후반부터 마한 계통 사람들이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적석총을 쓰는 새로운 집단이 이주했는데 이들은 한동안 북쪽 임진강 유역에 머물다가 3세기 중엽에 마한계 세력을 흡수하면서 서울 강남지역으로 남하해 본격적인 고대국가로서 백제를 건국했다.

석촌동 1호분은 고구려계 적석총인 남분과 마한계 분구묘인 북분으로 이뤄진 쌍분이며 백제 어느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이주민 세력이 마한 토착 세력과 연합해 백제를 건국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백제 건국이 고구려계 이주민에 의해 이뤄졌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무력에 의한 일방적인 건국이었다기 보다는 선주민과의 제휴를 통한 비교적 평화적인 과정을 거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왕계는 부여씨와 해씨, 온조·초고계와 비류·고이계 등 표현은 다르지만 이원적 계통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석촌동 고분군에는 고구려 계통 적석총과 마한 계통 분구묘가 적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면서 공존하고 있다. 이원적인 백제 왕계는 고구려계 이주민과 마한계 선주민을 반영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온조와 비류로 대표되는 고구려계 이주민 가운데 아우인 온조에 의해 백제가 건국됐다는 것은 형인 비류가 고구려계가 아니라 선주 마한계임을 말해주며 고구려계 이주민인 온조 세력이 마한계 선주민인 비류 세력을 병합했음을 암시해준다.

임영진(57)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사·석사·박사
-전 서울대박물관 연구원
-석촌동 고분군 발굴 참여 (1982~1987년)
-현 전남대 교수, 현 백제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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