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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차르 푸틴, 동방에 주목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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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남정호
순회특파원

러시아의 천년 고도 모스크바. 도심 한복판의 크렘린궁을 출발해 모스크바강을 따라 서쪽으로 20분쯤 달리면 푸른색 유리로 된 독특한 원통형 건물이 나온다. 200년 전인 1812년 9월 러시아군이 나폴레옹의 15만 프랑스군과 싸웠던 보로디노 전투 기념관이다.

 이곳에서 러시아의 명장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12만 명을 이끌고 나폴레옹군과 격전을 벌인다.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에서 묘사됐듯 전투는 더없이 처절했다. 양쪽 모두 3만~4만 명씩 7만여 명이 몰살당했지만 결론은 러시아의 승리였다. 쿠투조프는 모스크바를 몽땅 불사르고 퇴각하는 초토화 작전을 폈고 이로 인해 나폴레옹군은 영하 30도의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궤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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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는 기념관에 지난 3월 7일 예기치 않은 귀빈이 찾아왔다. 사흘 전 대선에서 승리한 ‘현대판 차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었다. 퍽이나 바쁘련만 그는 대형 그림들 앞에 서서 긴 상념에 빠졌다고 한다. 이 중에는 푸틴이 아끼는 코사크족 기마병들의 그림도 있었다.

 우크라이나 초원에서 살아온 코사크족은 나폴레옹 전쟁에 이어 제1, 2차 세계대전 등 위기 때마다 러시아를 위해 싸웠던 용맹한 유목민이다. 16세기말에는 시베리아 정복에 나서 러시아 동진정책의 첨병 노릇을 했다.

 푸틴은 이런 코사크족의 역사를 칭송하며 이들의 업적을 부각시켜왔다. 대선 직전인 지난 2월에는 한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코사크족 젊은이들을 잘 교육시켜 중요한 군사임무를 맡기자고 촉구했다. 2005년엔 코사크족을 징집해 이들로 꾸려진 특수부대를 창설하는 법안을 내기도 했다.

 푸틴의 보로디노 전투 기념관 방문과 코사크족 예찬은 단순한 개인적 취향 때문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서방 언론들은 두 사안 모두 강력한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의도된 제스처로 분석한다.

 무릇 국가 지도자의 성격과 취향은 구체적 정책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카리스마가 강할수록, 민주적 견제장치가 약할수록 더더욱 그렇다. 터프한 푸틴의 성향이 앞으로 러시아의 외교, 특히 한반도 정책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는 그래서 관심을 끈다.

 그의 외교 방향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 중에 이런 게 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 공무원들은 레닌의 초상화를 떼고 옐친 당시 대통령 사진으로 바꿔 달았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고위 공무원이던 푸틴은 달랐다.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그는 광대한 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닦았던 표트르 대제 그림을 걸었다.

 푸틴과 표트르 대제 모두 강력한 러시아 건설이라는 꿈을 지닌 야심가들이다. 차이라면 표트르가 서구화 정책을 밀어붙였던 데 반해 푸틴은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푸틴은 지난 5월 내각을 짜면서 시베리아 발전계획을 전담하는 극동개발부를 신설한다. 그러고는 빅토르 이사예프 극동연방관구 대통령 전권대표를 임명해 책임을 맡겼다. 이사예프는 18년간 하바롭스크 주지사를 네 번 역임한 동아시아통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취임 당일 외교 기조를 밝히는 대통령령을 발표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에 있어서 극동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가난한 동토의 땅에서 탈출하려는 이주민들이 속출해 이 지역 인구는 격감하고 있다. 91년 860만 명이던 극동연방관구 인구는 2010년 650만 명으로 210만 명이 줄었다. 19년 만에 인구의 4분의 1이 증발한 셈이다. 이대로면 극동 러시아의 황폐화는 시간문제다. 게다가 최대 교역 파트너였던 유럽의 경기가 꺼지면서 동아시아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다음으로 눈여겨볼 대목은 지하자원에 대한 푸틴의 각별한 관심이다. 표절 논란에 휩싸이긴 했지만 97년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시장관계 형성하에서 지역자원 이용 계획’이었다.

 러시아가 극동지역의 황폐화를 막으려면 지역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상용화할 만한 첨단기술도, 풍부한 인적자원도 부족한 터라 당장 손쉽게 쓸 수 있는 카드는 자원 개발뿐이다.

 특히 시베리아엔 천연가스가 풍부하다. 세계 1위인 러시아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44.6조㎥. 전 세계의 5분의 1 이상으로 절반 이상이 러시아 우랄산맥의 동쪽에 묻혀 있다.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가스 파이프만 한 게 없다. 따라서 활력 넘치는 동아시아 시장 공략을 원하는 러시아로서는 한반도 가스관 설치사업이 중대 사안일 수밖에 없다.

 이 계획이 실현되려면 남쪽으로의 안정적인 가스 공급을 보장하겠다는 북한 정권, 그것도 최고위층의 다짐이 필수적이다. 많은 싱크탱크에서 벽에 부닥친 가스관 사업을 위해 푸틴이 남·북·러 3국 정상회담을 추진할 걸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푸틴이 연출하는 남·북·러 정상회담은 머잖아 성사될 것인가. 러시아 현지 전문가들은 다소 부정적이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콘스탄틴 후돌리 교수는 시기상조론을 폈다.

 그는 “현재 러시아는 여러 경로로 북한 새 지도부의 동향을 파악 중인 상태”라며 “젊은 새 지도자가 실질적인 파워를 확보했다는 걸 확인한 뒤 구체적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게 개인적 소신”이라고 밝힌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푸틴의 대권 복귀 이후 극동으로 향한 러시아의 관심이 고조됐다는 거다. 갈수록 요긴해지는 러시아라는 지렛대를 이용해 꽉 막힌 남북관계를 돌파할 기회도 한층 커졌다는 의미다. <모스크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