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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3세의‘경영實戰’ 본격 시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건희(李健熙) 삼성 회장의 장남인 재용(在鎔·33)씨가 마침내 경영 일선에 등장했다. 지난 3월11일 삼성의 정기 임원 승진 인사에서 삼성전자 상무보로 선임된 그는 미국 생활을 정리하는 대로 4월 중 귀국해 서울 삼성전자 본사로 출근한다.

지난해 말부터 나돌던 경영 참여설이 현실화하면서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삼성 내 역학과 기류의 변화는 어떨지 등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섣부른 후계 구도 논의까지 회사 안팎에서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삼성 측은 “이상무보가 아직 젊은 데다 부친이 건재한 상황에서 후계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진화에 나서고 있다.

실제로 그는 대학 졸업 후 10년 가까이 학교 공부에만 몰두해 와 지난해 삼성 내 벤처 비즈니스에 간여한 일 이외엔 회사 실무를 해 본 경험이 없다. 따라서 당장 거대 삼성전자의 경영 전반을 챙길 가능성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그보다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사장급) 등 노련한 전문경영인 밑에서 상당 기간 실전 수업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계속 경영의 일각에 머물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이회장은 최근 한 월간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회사 경영에 관심이 많고 자질도 엿보이는 것 같다”고 아들을 평했다. 이상무보의 첫 근무부서 역시 삼성전자의 미래경영 전략을 짜는 핵심 중에 핵심 포스트. 강도 높은 후계 수업을 받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 재용씨의 입지 = 이상무보는 삼성전자 등 주력사에서 경영 역량과 리더십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삼성의 후계 구도가 시간을 두고 가시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적어도 10년 가까이 경영 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1987년 47세에야 총수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거론했다.

하지만 이상무보의 지분 현황이나 맡은 일의 비중으로 볼 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시각이 만만찮다. 주요 삼성 관계사에 대한 지분 규모만 놓고 볼 때 그는 부친 못지않은 그룹 내 지배력을 이미 확보했다. 우선 삼성 오프라인 계열사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의 최대 주주(지분 25.1%)다. 이 회사는 삼성생명 지분을 19.3%로 확보해 간접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삼성생명이 주요 주주인 삼성전자·물산·화재·증권 등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온라인 계열사의 지주회사인 삼성SDS의 최대 주주(10.1%)이기도 하다.

증권거래소가 지난 3월 초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이상무보는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이재현 제일제당 부회장 다음으로 국내에서 상장 주식이 네번째(지난 3월 6일 현재 2천5백76억원)로 많은 사람이다.

게다가 그가 4월부터 출근할 경영기획팀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의 우수 인력과 고급 정보가 집결해 장단기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핵심 부서다. 경영전략과 재무를 총괄(CFO)하는 최도석 사장이 관장하고 김현덕 전무가 팀장을 맡고 있다. 경영전략·미래전략으로 나뉘어 사내외의 또 나라 안팎의 고급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전략경영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입주할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의 25층 역시 윤종용 부회장 등 그룹 수뇌부들이 자주 모여 회사 및 그룹의 경영전략회의를 여는 곳이다. 그룹의 핵심 인사들과 수시로 만나 함께 호흡하면서 경영 전반의 흐름을 하루 빨리 익히도록 한 배려로 풀이된다.

사실 나이가 젊다고 하지만 부친이 동양방송 이사로 26세에 경영수업을 시작한 것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늦었다는 시각도 있다. 최태원 SK 회장 등 굴지 대기업의 오너 2, 3세들이 이미 수년 전부터 경영에 참여, 입지를 다지고 있는 점도 조기 부상론을 거들고 있다.

하지만 그 부상 시기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우선 참여연대 등 일부 시민단체의 문제 제기로 불거진 편법상속에 대한 여론의 향방이 경영권 승계 시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울러 지난 3월9일 삼성전자 주총에서 참여연대가 제기한 것처럼 3세 경영자의 자질론 시비를 잠재우려면 이를 반박할 만한 충분한 실력발휘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윤종용 부회장은 “재용씨가 해외에서 여러 해 국제 경영감각을 익혔고 어릴 때부터 창업주인 故 이병철 회장과 부친에게서 혹독한 경영·수신(修身) 수업을 해와 경영자의 자질을 갖췄다고 본다”고 말한 바 있다.

◇ 재용씨는 누구 = 훤칠한 키(1백82㎝)에다 호남형 인상에서 풍기듯 부친보다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알려졌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겸손한 편이고 특히 삼성의 전문경영인들을 만나면 깍듯이 예우를 갖춘다”고 전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함께 하고 미국계 컨설팅 회사 AT커니에서 일하는 이현승(34·전 재정경제부 서기관)씨는 “통학 시간을 아끼려고 기술사 생활을 할 정도로 검소하고 성실했다. 예의 바르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편으로 리더 자질이 있다고 본다”고 평했다.

영어·일어 능통 - 中 고문 독해도 수준급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상무보는 서울 청운중·경복고와 서울대 인문대 동양사학과를 나온 뒤 1995년 일본 게이오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했다. 이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을 거쳐 비즈니스 스쿨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10년 가까이 해외에서 공부한 덕분에 영어·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중국 고문(古文)의 독해 능력도 수준급으로 알려졌다.

미국 유학이 대세이던 시절에 굳이 일본에서 석사를 한 것은 부친의 권유 때문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배우고 함께 사업할 나라는 일본과 미국인데 일본을 나중에 보면 일본 사회의 희생, 일본 문화의 섬세함, 일본인의 인내성을 알지 못한다”는 게 이회장의 뜻이었다고 한다.

삼성 관계자는 “일본 유학 시절을 전후해 삼성전자 미주법인 소속 직원이 된 이상무보는 할아버지의 무한탐구 정신과 아버지의 기술 중시 정신을 점목해 신기술 관련 연구개발(R&D)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삼성은 그의 임원 승진 발표 직전 언론 요청에 대비해 그의 소감을 대신 전했다.

이상무보는 본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 분야를 새로 개척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는 것.

고 이병철 창업주의 사업 이념인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와 부친이 추구한 질 중시 신경영에다 어떤 식으로 주주중시 경영을 접목시켜 나갈지 주목되는 부문이다.

그가 외부에 조금씩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미국 유학 중에 틈틈이 서울을 오가며 그룹 내 벤처사업을 주도한 것. 이 때 세워진 회사가 그가 대주주로 있는 e삼성(60%)·시큐아이닷컴(50%)·e삼성인터내셔널(55%) 등이다. 이 때문에 관심 분야가 e-비즈니스에 치우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컴퓨터 연관 산업에 관심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게이오대 석사논문 제목은 ‘일본 제조업의 산업공동화에 관한 고찰’이었고, 미국 유학 시절에도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인 반도체·모니터·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등을 중심으로 컴퓨터 산업의 전후방 효과에 대해 연구했다.

여동생이 셋인 이상무보는 1998년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 세령씨와 결혼해 지난해 12월 첫 아들을 얻었다. 결혼 당시 재계의 영호남간 혼사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오랜 해외 생활에서 익힌 골프 솜씨가 수준급이어서 핸디캡 6의 싱글을 자랑한다. 영화감상도 좋아한다.

이상무보의 실전경영 가정교사가 누가 될지에도 관심이 많다. 윤종용 부회장과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이외에 이윤우 반도체 총괄 사장, 이기태 정보통신 총괄 사장, 진대제 디지털 가전 총괄 사장 등 삼성전자의 간판급 테크노 CEO들이 1순위로 꼽힌다. 이미 이상무보와 국내외에서 자주 만나면서 기술과 경영의 가정교사 역할을 해 왔다.

이회장의 해외 출장 수행을 자주 한 황영기 삼성투신운용 사장과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장(부사장) 등도 재무·금융통으로 이상무보를 가깝게 지원할 인사로 거론된다.

홍승일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 (hong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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