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급락하는 한국 ‘대차대조표 불황’ 가는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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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쿠

가계부채가 요즘 최대 화두다. 진단과 처방을 놓고 국내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는 리처드 쿠(58) 노무라종합연구소의 수석이코노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빚이 거시경제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전문가로 꼽힌다. 그의 핵심 논리는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이다. 가계와 기업의 빚이 늘고 자산 가격이 추락하는 바람에 발생하는 침체다.

 -한국 가계부채가 빠르게 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주택담보대출과 신용카드 빚 등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빚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선 빚 규모를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대차대조표란 장부를 보면 빚 반대편에 자산이 있다. 한국 가정도 예금·주택 등 다양한 자산을 갖고 있다. 그 값들이 오르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고통이 시작된다.”

 -요즘 한국 집값이 떨어지고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할 것 없이 집이 가계의 최대 자산이다. 이런 자산 값이 ‘얼마나 빠르게 떨어지는가’가 중요하다. 한국 집값이 요즘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 경제가 대차대조표 불황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차대조표 불황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가계·기업이 호황이나 버블 끝 무렵에 돈 버는 일보다 빚 줄이기(디레버리징)에 나선다. 가계는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삭감한다. 경제는 활력이 떨어지며 침체에 빠진다.”

 -한국이 대차대조표 불황에 빠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예컨대 한국은행(BOK)이 기준금리를 낮춰보면 알 수 있다. 가설이긴 하지만 기준금리를 낮췄는데 가계와 기업이 돈을 빌리려 하지 않으면 일단 대차대조표 불황이다.”

 -어떻게 그 불황을 막을 수 있을까.

 “‘프리 워크아웃(가계부채 구조조정)’ 등 미시적 정책 못지않게 거시경제의 성장 엔진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가 1997년 경제를 개혁한다며 재정을 긴축하는 바람에 일본 경제의 대차대조표 불황이 본격화했다. 중대한 실수였다.”

 쿠가 일본 이야기를 하면서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화두인 유럽위기로 넘어갔다. 그는 “일본과 미국뿐 아니라 스페인·포르투갈·아일랜드가 대차대조표 불황에 빠져 있다”고 잘라 말했다.

 -처방이 궁금하다.

 “가계와 기업이 빚 줄이기를 위해 저축한 돈을 정부가 끌어다 수요를 유지해야 경제 붕괴를 막을 수 있다. 가계와 기업이 빚을 줄이는 와중에 정부마저 긴축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유럽을 봐라. 긴축하다 경제를 망가뜨려 놓았다.”

 -최근 유럽 리더들이 성장에 1200억 유로를 투입하기로 했다.

 “(목소리를 높이며)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 정책 방향은 기본적으로 긴축 쪽이다. ‘하시모토 오류’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은 어떤가.

 “지난달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올해 말, 내년 초 ‘재정 한계상황(Fiscal Cliff)’을 경고했다. 부채위기 때인 지난해 8월 백악관-공화당 자동삭감 합의에 따라 예산 530억 달러(약 60조4000억원)가 자동 긴축된다. 마침 감세도 끝난다. 중대한 위기다.”

 -왜 그런가.

 “되풀이 말하지만 미국 가계와 기업은 여전히 빚 줄이기를 하고 있다. 미 연방정부마저 예산 삭감에 들어간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미 경제가 더 깊은 침체 수렁에 빠질 수 있다.”

 -정부가 시중 자금을 대부분 조달해 쓰는 바람에 기업이 투자할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까.

 “가계와 기업이 디레버러징을 할 땐 구축효과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 효과는 경기가 일상적일 때나 일어난다.”

 -그토록 부작용이 심한데 왜 긴축이 요즘 미덕으로 여겨질까.

 “개인이나 기업이 자산 내용(대차대조표)을 건전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상식 때문이다. 정책 담당자들과 전문가들이 그런 상식이 버블 붕괴 직후 같은 비상시에도 통할 줄 알아서 문제다.”

리처드 쿠 1954년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79년엔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았다. 곧바로 뉴욕연방준비은행 이코노미스트가 돼 84년까지 일했다. 그리고 노무라종합연구소에 영입됐다. 그는 90년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의해 일본 최고 경제분석가로 선정됐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대침체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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