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광양만의 진린(陳璘)제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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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일본은 조선에 재침(정유재란), 한반도의 동남해안 3대 거점에 왜성을 쌓고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울산성,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사천성 그리고 순천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둔하고 있었다.

1598년 8월(음력)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일본조정은 한반도의 일본군 철수를 명령하였다. 명(明)의 진린제독과 이순신장군의 조명(朝明)연합수군은 그해 11월 광양만의 순천성을 봉쇄하여 고니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사천성에 주둔중인 시마즈군이 지원에 나섰다. 조명연합군은 시마즈군이 광양만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노량(露梁)에 매복하고 전력을 집중하였다.

시마즈군은 노량에서 조명연합수군에 크게 패하고 사천성으로 퇴각한다. 고니시군은 그 틈을 타서 순천성을 빠져나와 엑스포가 개최되고 있는 여수 앞바다를 통해 일본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장군은 관음포에서 유탄에 맞고 광양만으로 피하였으나 결국 전사한다. 진린제독의 부장으로 70세의 노장 등자룡(鄧子龍)장군도 전사하였다. 진린제독은 이순신장군의 시체를 거두어 명의 수군사령부 완도 고금도에서 극진한 예를 올려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선조대왕에게 장계를 올려 순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이순신장군의 순직을 애통해 하며 그를 송(宋)의 충신 악비(岳飛)에 비유하는 등 최상급의 존경을 표시하였다. 진린은 처음에는 조선을 얕보아 무례하였으나 이순신 같은 인물이 있음을 알고 겸손해졌다고 한다.

중국 광동성 사오구안(韶關)출신의 진린(1543-1607)은 중국 남부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일본군) 방어사령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의 조정에서는 왜구전문가 진린에게 군선 550척에 수군 13000명을 주어 1598년 조선에 파병하였다.

진린은 임진왜란시 파병된 명의 장군 중에 무공을 가장 크게 세운 명장으로 평가되어 귀국후 호광총병(湖廣總兵)등 주요직책에 중용되고 후손들은 대를 이어 벼슬을 하였다. 그 후 명이 망하자 진린제독의 후손 진영소(陳泳素)는 청(淸)군의 추적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남명의 수도 남경(南京)에서 배를 띄워 남해 장승포에 망명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는 할아버지의 명성이 남아 있는 조선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 한국에 2000명 정도 살고 있다는 광동 진(陳)씨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최근 여수 엑스포 개막에 맞추어 광양만 묘도(猫島)의 남북을 이어주는 2개의 현수교가 건설되어 임시개통 되었다. 북단(광양-묘도)은 광양만에서 순직한 이순신장군을 기려 “이순신대교”로 이름 지었다. 주탑간의 길이도 이순신장군의 탄생연도에 맞추어 1545m로 하였다. 묘도에서 여수시내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다리는 여수대교다.

중국에서는 여수 엑스포가 개최되는 금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정하여 많은 중국 관광객이 여수 엑스포를 방문하고 있다.

진린제독의 전공(戰功)과 이국(異國)의 겨울바다에 목숨을 던진 이름없는 명나라 수군들을 기억하는 마음이 여수 광양만 어딘가에 소개된다면 여수 엑스포를 찾는 중국 사람들의 감회는 크게 다를 것이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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