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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가뭄 기록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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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06면

한반도에 가뭄이 잦았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소개된다. 실록을 보면 음력 4월, 7월 사이에 기우제는 연중행사였다. 태종(太宗) 재위 18년간 기우제 기록이 없는 해는 1403년(태종 3년) 한 해뿐이다. 나머지 17년간은 매년 2~3회씩, 1416년 한 해에는 무려 9회의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실록에는 태종 즉위 뒤 극심한 가뭄으로 모든 곡식이 말라 죽자 전국의 민초들이 유리걸식하며 길가에 굶어 죽은 시체가 넘쳐났다고 적고 있다. 급기야 1442년 7월 9일 조정회의에서는 비를 내리기 위해 진양 출신 도술가 문가학을 동원하라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세종은 극심한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데 궁궐이 너무 크고 사치스럽다고 느껴 작고 아담한 서이궁(西離宮)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까지 한다. 황희·유정현 등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백성을 가엽게 여기는 임금의 마음이 드러난다. 어느 해에는 경기도와 평안도에 큰 가뭄이 들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세종은 사람이 죽은 고을의 수령들을 불러 곤장 80대씩을 때리거나 변방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고종 때만 해도 186건의 기우제 기록이 보이는데, 1882년 5월 4일에 “삼각산과 목멱산에서 여섯 번째 기우제를 지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지금이야 기우제가 미신이지만 당시엔 그만큼 비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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