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우울증 … 그 아픔까지 사랑할 순 없었나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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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호 20면

일러스트=강일구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요.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아내가 우울증이 있다는 걸 남편이 뒤늦게 알게 되면서 남남의 길을 걷게 된 한 부부가 있습니다. 부부의 연을 이어가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배려와 책임이 따르는 걸까요. 사생활 보호를 위해 내용은 각색했습니다.

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부부들 ④ 동반자의 조건

아내(45)의 이야기
꿈틀, 배 속 아이가 요동을 친다. 내가 울고 있는 걸 아는 건지, 위로라도 하듯 오늘따라 태동이 한결 부드럽다. 임신 6개월. 이젠 엄마 목소리까지 알아들을 수 있다는데, 남편은 끈질기게 “아이를 지우라”고 요구한다.

남편과 나는 늦깎이 결혼을 했다. 서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뒤늦게 만났다. 남편은 대학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한눈에도 성실한 인상이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강단 있는 성격.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났지만 듬직한 그가 좋았다. 결혼할 당시 그의 나이는 43살, 나는 33살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가정을 이뤘으니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가 갖고 싶었다. 그를 쏙 빼닮은 아이를 말이다.

2000년 3월,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파란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빌라에서 영화 주인공처럼 웃고 떠들며 지냈다. 여행 중 무심코 그에게 가벼운 우울증이 있다는 말을 꺼낸 것이 화근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갖지 말자.”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는 대화를 거부했다. 결혼 전에 다소 우울증이 있긴 했지만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TV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보긴 했지만 자살충동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차갑게 변한 남편의 마음을 돌리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밤이 이어졌다.

우울증이 다시 찾아온 건 이듬해였다. 나는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치료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3년 가까이 병원을 다녔다. 그리고 기적처럼 아이가 생겼다. 하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에게 유전될 수 있으니 아이를 지우자”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는 내가 임신한 걸 알면서도 술을 권하거나 임신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라며 사 들고 오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선 육아가 문제였다. 출산 후엔 평범한 여자들도 가벼운 우울증세를 보인다는데, 남편은 분유를 타다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나를 볼 때마다 타박을 했다. 분유, 기저귀를 사는 데 필요한 생활비가 끊어졌고, 남편의 폭언이 늘어났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를 낳은 지 1년 만에 우울증이 재발했다. 갓난쟁이 아들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라도 낫고 싶었다.

지난해 3살짜리 첫애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린이집에 가보니 아이가 없었다. “아빠가 데려갔다”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골에 있는 남동생네에 맡겼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남편은 아이를 곧 데려올 것처럼 말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아이는 볼 수 없었다. 병원에서 “완치됐다”는 판정을 들은 2010년 초, 친정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엄마와 함께 아이를 데려왔다. 그러고는 살던 집을 나와 별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법원에서 이혼 소장이 날아왔다. 배 속엔 둘째가 자라고 있었지만,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참다 못해 “아이가 생겼다”고 했지만, 그는 “내가 원하는 아이가 아니다. 낙태하라”고 차갑게 말했다.

법원의 판단은
부부가 이혼 다툼을 하는 사이에 배 속 아이는 태어났다. 남편은 “두 아이 모두 내가 키우겠다”고 주장했다. 아내는 “병이 완치됐으니 키우는 덴 문제가 없다”며 두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했다.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은 이 부부에게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파탄의 책임은 양쪽에 있다고 봤다. 법원은 남편에겐 “아내의 병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동생 부부에게 아이의 양육을 맡긴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아내 쪽엔 ‘바람직한 양육방법을 찾아보지 않고 아이를 데리고 나와 별거를 시작했고,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다. 법원은 두 아이를 엄마가 모두 키울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해 큰아이는 아빠가,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둘째는 엄마가 키우도록 했다. 아내를 대리해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질환이 있으면 잘 치료하도록 돕는 것이 부부 아니겠느냐”며 “남편이 마음의 문을 열었다면 이혼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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