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장기하, 리버풀서 비틀스를 만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록의 전설’을 찾아 영국 리버풀에 갔다. 록그룹 비틀스(Beatles)를 배출한 리버풀은 록 팬들에겐 존재감이 워낙 거대하다.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들뜨게 만든다.

런던에서 네 시간을 달려 리버풀에 도착하니 밤 열 시가 넘었다. 몸도 피곤했고 다음날 에도 빡빡한 일정이 이어졌기때문에 처음엔 푹 자둬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돌연 생각이 바뀌었다. 초기 비틀스의 로큰롤이 로비에 울려 퍼지고 있었고 바에 모인 사람들이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런던에서는 운이 좋게도 숙소 바로 옆이 EMI 건물이었다. 아침에 나오면서 한 번, 밤에 돌아오면서 한 번. 매일매일 비틀스(Beatles) 형님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래, 비틀스의 고향에서 맞는 단 하룻밤을 잠으로 날려 보낼 수는 없지!

짐을 풀자마자 첫 번째로 보이는 펍에 들어갔다. 입추의 여지가 없는 가운데 사람들이 돌아가며 노래방 기기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린킨 파크(Linkin Park)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오아시스(Oasis)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큰 소리로 웃어 젖히며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확실히 런던의 펍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 주변에 있는 서너 개 펍과 클럽에 들러 각각 맥주 한 잔씩을 마셨다. 어떤 클럽에서는 3인조 밴드가 영국의 유명한 올드 록 넘버들을 연주하고 있었고, 또 다른 클럽에서는 DJ가 하우스 류의 쿵쿵대는 음악을 틀고 있었다. 꽤 쌀쌀한 날씨라 점퍼를 걸치고 나갔는데 남자들은 죄다 반 팔 티셔츠를, 여자들은 모두 어깨와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동네 전체가 작정하고 놀겠다는 분위기였다. 세련된 느낌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흥에 있어서는 런던보다 한 수 위였다.

비틀스 멤버들의 어린 시절 추억이 어린 곳, 리버풀의 페니레인 거리. 그들의 추억을 바탕으로 같은 제목의 노래가 탄생되기도 했다.

캐번클럽(Cavern Club)은 무명시절 비틀스가 300회 이상 공연을 한 곳이다. 이들은 이 곳에서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고향을 떠났다. 비틀스의 음악이 태동한 곳이기에 팬들에겐 성지(聖地)와 같은 장소다. 리버풀까지 와서 캐번클럽을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찾아갔을 때 평일 낮이었는데도 한 신인가수가 맥주를 마시며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서 비틀스의 명곡들을 메들리로 부르고 있었다. 비록 비틀스는 없었지만 그들의 자취와 흔적은 여기저기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둘러본 리버풀의 거리는 지난 밤과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어젯밤 그 번화가에서 본 흥겨움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거리 구석구석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비틀스 멤버인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과 링고 스타(Ringo Starr)의 생가 앞도 마찬가지였다.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존 레넌(John Lenon)의 생가에는 그나마 작은 간판이라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전설적인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살던 집은 그저 주변의 똑같이 생긴 허름한 연립주택 사이에 끼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존 레논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스트로베리 필드(Strawberry Field)’는 문이 잠겨 있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폴 매카트니의 곡 제목인 ‘페니 레인(Penny Lane)’은 평범한 길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걸으면서 노래의 기분을 즐겼다. ‘페니 레인’을 흥얼거리며 걸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길을 걸으며 느꼈던 기분이 잊혀지지 않는다. 비탈진 데다 워낙 곧아서 초입에서부터 훤히 다 내려다보였던 길, 다리 밑으로 나 있는 철길, 제멋대로 풀이 자란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와 눈인사를 한 것 등 소소한 기억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단지 폴 매카트니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길의 색감이 이상할 정도로 뚜렷하다. 그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길의 느낌 말이다.

글=장기하(가수)
사진=이병률(시인, 여행작가)

글=장기하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그룹 ‘장기하와 얼굴들’을 이끌고 있다. 데뷔 첫해인 2008년 싱글 ‘싸구려 커피’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노래’ ‘최우수 록 노래’ ‘네티즌이 뽑은 올해의 남자 아티스트’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올해 열린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는 ‘올해의 음반상’ ‘올해의 음악인상’ ‘최우수 록 음반’ ‘최우수 록 노래’ 상을 받았다. 현재 SBS 파워FM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DJ로 활동 중이다.

사진=이병률 시인. 혼자 글 쓰고 사진 찍어 엮은 여행 에세이 『끌림』의 저자다. 2005년 출간된 『끌림』은 40만 부 이상 팔린 여행 에세이 최고의 스테디셀러다.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등을 냈다. 현대시학작품상을 수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