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롤모델의 진로 조언 ⑧ 김선정 큐레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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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정 큐레이터는 “학문적 지식은 물론 문화와 생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미술 기획사 ‘사무소’]

“소통입니다.” 큐레이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으로 김선정 큐레이터(46·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이론과 교수)가 꼽은 대답이다. 올 9월에 열릴 2012 광주 비엔날레에서 공동예술감독을 맡은 그는 미래 큐레이터를 꿈꾸며 찾아온 황선희(인천 인천하늘고 2)양에게 “기획부터 선정까지 전시를 총괄하려면 문화차이를 극복하는 열쇠가 소통”이라고 강조했다.

황선희=기획부터 작품·작가 발굴, 전시까지 큐레이터의 역할이 방대하다고 들었습니다.

김선정=전시를 기획하고 작가를 선정·발굴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엔 ‘레지스터(Register)’라고 해서 미술 컬렉션을 정리하는 사람도 있고, 미술관 내 교육을 담당하는 이도 있어요. 국내 작품이 외국에 전시될 경우 미술품의 안전한 수송을 위해 손상 여부를 점검하기 위해 함께 이동하기도 하고요. 하나의 전시를 위해 긴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근성이 필요해요. 전시를 준비하는 기간이 2~3년에서 길게는 5년까지 걸리거든요. 주제 선정에서부터 언제 어디서 하면 좋을지, 장소와 규모까지 계산해야 하죠. A부터 Z까지 전시를 총괄하기 때문에 상당한 학문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인천 하늘고 2학년 황선희양

선희=그런 역량을 동시에 발휘하려면 어떤 능력을 길러야 할까요.

김=업무의 3분의 1이 출장일 정도로 외국 큐레이터들과 함께 준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때 요구되는 자질이 ‘소통능력’이에요.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면서 합의점을 찾아야 하거든요. 8개국에서 모인 큐레이터 9명과 일한 적이 있어요. 한 번은 한국·중국·일본 큐레이터가 모였는데, 그 자리를 3명의 큐레이터가 각 국가에서 한 달씩 전시를 여는 기획 자리로 만들었죠. 이를 위해 같이 밥도 해먹고 잠도 자면서 친구가 돼 아이디어를 모았습니다. 개인적인 전시로 끝날 수 있었던 그 자리를 한국·중국·일본에서 모두 여는 대형 전시로 키울 수 있어 뿌듯했어요. 그 전시를 열기까지 총 3년이 걸렸지만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올해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중국·일본·인도·카타르·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여성기획자와 함께 일하고 있어요. 문화 방식과 가치관이 다르다 보니 소통하는 데만 10개월이 걸렸어요. 하지만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에 대한 생각을 주고 받으니 어느새 의견이 모아지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선희=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어떤 공부와 실무 과정을 거치셨나요.

김=제가 이른바 1세대 큐레이터예요. 당시 국내엔 큐레이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때라 전 엄마 친구 딸의 진로 선택을 따라 하면서 예원학교·서울예고를 나와 이화여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국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백남준 작가가 뉴욕 휘트니미술관에 인턴십을 추천해 주셨어요. 1년 이상 인턴을 하면서 미술관 시스템과 업무에 대해 익혔습니다. 요즘은 큐레이터 학과도 많고 큐레이터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해졌어요. 이 때문에 꼭 미술학과로 전공을 국한짓지 말고 철학·사학 등 자신이 좋아하는 전공을 택했으면 해요.

선희=지금까지 기획하신 전시 중 기억나는 전시가 있으신가요.

김=1995년에 ‘싹’ 전이 제 첫 큐레이팅이었어요. 아트선재센터가 생기기 전의 자리에 있던 한옥집을 개조해 전시를 열었죠. 한옥·양옥·일본식 가옥이 혼재돼 있는 북촌 마을에서 전시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어요. 한국전쟁 전과 후를 집의 변화를 통해 보여주자는 의도였죠. 저의 첫 기획물이라 모든 일을 거의 혼자 했어요. 전시를 소개하는 엽서를 인쇄해 집에서 혼자 풀칠하고 우편물을 보냈었죠. 당시만 해도 건물 밖에서 하는 전시가 많지 않아 ‘집’이라는 소재를 대상으로 한 ‘싹’ 전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나타냈어요. 때마침 광주 비엔날레가 시작된 해라 외국 사람들의 주목도 끌 수 있었습니다.

선희=겉으론 화려하게만 보였던 큐레이터의 보이지 않는 땀방울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청소년이 어떤 방향을 갖고 진로를 설계하면 좋을까요.

김=세계 미술관이 여러분의 미래 직장이 될 수 있어요. 본인의 자질과 준비 역량에 따라 큐레이터로서 일할 수 있는 장소는 전 세계에 무궁무진해요. 미술관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조직에서는 여러 가지 안정적인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고, 작은 조직에선 핵심 노하우를 배울 수 있거든요. 과거엔 미술관이 소유한 작품을 갖고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하는 작업이 큐레이터의 일이었습니다. 미래에는 큐레이터의 역량에 따라 전시를 창조적으로 기획·작업하는 일이 더욱 늘어날 거예요. 이를 고려해 내가 어떤 큐레이터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무엇을 재미있어 하는지 스스로 찾아 보세요.

김선정 큐레이터는

2012 독일 ‘카셀 도큐멘타 13’의 큐레이터 팀 에이전트에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뽑혔다. ▷2005년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0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감독 ▷‘미디어 시티 서울 2010’의 전시총감독 등을 역임했다.

글=김슬기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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