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배·옆구리가 수시로 콕콕…꾀병이라뇨, 지옥 오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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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강일구]

“높은 곳에 올라가면 뛰어 내리고 싶다”(최진선·26·여·경북 상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다”(박주희·가명·39·여·서울 동작구) “암보다 무서운 것 같다”(황정택·54·여·경북 청송)…. ‘만성골반통’을 겪는 여성들의 호소다. 골반을 중심으로 하복부에 나타나는 극심한 통증 때문이다. 심하면 신체 여기저기가 아프다. 증상이 다양하고 진단이 쉽지 않아 10년 이상 고통과 씨름하기도 한다.

최진선씨는 4년 전 꼬리뼈 통증이 시작돼 정형외과를 찾았다.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증상이 심해졌다. 신경외과·산부인과·통증클리닉·한의원을 전전했다. X선·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영상촬영(MRI) 등 온갖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다. 통증은 골반·발·어깨까지 번졌다. 6개월간 누워만 있기도 했다. 최씨는 “통증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친구·가족까지 ‘그 정도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이해하지 못했다. 억울해서 죽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올 봄 서울의 한 병원 산부인과에서 통증의 이유를 잡았다. 자궁에 문제가 생긴 자궁내막증이 원인이었다. 최씨는 수술을 받고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그는 “수술 당일 4년 만에 꿀잠을 잤다”고 말했다.

▶80%가 자궁 내막증 등 산부인과 질환이 원인

만성골반통은 월경통과 무관하게 아랫배·골반·허리·엉덩이 부위에 통증이 6개월 이상 지속되는 질환이다.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허주엽 교수(만성골반통학회장)는 “이 병이 의료계에 알려진 건 10여 년 됐지만 증상이 다양하고 진단이 늦어져 고통받는 여성이 많다”고 말했다. 통증은 진통제나 항생제를 복용해도 거의 효과가 없다. 결국 가정을 돌보기 힘들고 부부갈등이 생긴다 아예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만성골반통의 원인은 산부인과·비뇨기과·근골격계 질환, 스트레스 등 다양하다. 허 교수는 “약 80%의 원인이 자궁내막증·자궁선근증·골반울혈증후군 같은 산부인과 질환”이라고 설명했다. 남성 환자는 거의 없다.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기경도 교수는 “자궁내막증과 선근증은 월경으로 배출돼야 할 자궁 안쪽 조직(내막)이 나팔관을 타고 자궁 주변에 퍼지거나 자궁근육에 파고들어 염증을 일으키는 병”이라고 말했다. 골반울혈증후군은 난소와 골반 부위에 있는 정맥에 혈액이 고여 통증을 일으킨다.

이외에 방광염·요도증후군·과민성대장증후군·근막동통증후군 등이 만성골통과 관련 있다. 정신적·심리적 요인도 영향을 준다.

▶2011년 12만 명 진단…20~30대 환자 크게 늘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자궁내막증·골반 부위 통증 등 만성골반통과 관련된 환자가 최근 5년간 매년 7~14%씩 증가했다. 2007년 8만4221명이던 환자는 2011년 12만8610명으로 늘었다.

허 교수는 “산부인과를 찾는 여성 중 약 15%가 만성골반통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가임기인 20~30대 여성 환자가 늘고 있어 문제다. 허 교수팀이 2008년 6월부터 2011년 5월까지 자궁내막증 등 산부인과 질환으로 만성골반통을 호소한 환자 3606명을 분석했다. 그 결과 30대 여성 비율이 3년 새 20.9%에서 25.8%으로 늘어 증가폭이 가장 컸다. 20대 환자도 10%를 차지했다.

기 교수는 “만성골반통을 야기하는 산부인과 질환은 불임과 난임을 부른다”며 “배란장애가 3배 더 생기고, 증상이 심하면 자궁을 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박주희씨는 5년 전부터 극심한 월경통에 시달렸다. 자궁내막증이 원인이었다. 박씨는 “다리를 질질 끌며 출근했다”고 말했다. 결국 미혼인데도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궁을 적출했다. 허 교수는 “한국 여성은 가족 뒷바라지 하느라 병을 키워 40~50대 만성골반통 환자가 가장 많다. 조기에 치료받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트레스 지속되면 재발”

스트레스는 만성골반통을 악화시키는 주범이다. 허 교수는 “여성호르몬과 자율신경에 영향을 줘 자궁을 비정상적으로 수축시킨다”며 “특히 치료를 받아도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다시 재발한다”고 덧붙였다.

황정택(54·경북 청송)씨는 1997년부터 자궁내막증에 따른 만성골반통증으로 고생했다. 어쩔 수 없이 자궁과 왼쪽 난소를 제거했다. 하지만 남겨뒀던 오른쪽 난소의 문제로 재발했다. 이 영향으로 대장과 질 일부를 잘라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황씨는 “남편이 항상 과음을 했고, 가족에게 화풀이를 했다”고 회상했다.

허 교수는 “여성이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선 남편의 이해와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씨의 남편은 병이 재발한 아내의 이유를 듣고 최근 술을 끊었다. 황씨는 “약물치료를 받으며 만성골반통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만성골반통의 심각성을 알리고 정보를 나누기 위해 2008년 환우회가 발족했다. ‘나비회’다. 나를 이기고 건강을 향해 비상하는 만성골반통 환우회의 약자다. 인터넷 카페(http://cafe.naver.com/worldcpp)를 운영 중이다. 나비회 회원은 국내, 외 약 3000명이다.

황운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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