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까 말까. 이 보다 더 편할 순 없다. 함께 하기에 더욱 좋은 인스피리언스족. 백혜선·이주연·노송씨(위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두 살 터울 오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회사원 이주연(25)씨.
그는 요즘 주말마다 집에서 파티를 연다. 거창한 건 아니다. 그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뿐이다.
최근 DVD가 내장된 프로젝터와 77인치 와이드 스크린을 산 덕분이다. 집에 오는 친구들도 자기들만의 역할이 있다.
한 명은 집에서 직접 구운 쿠키와 파이를 가져오고, 또 한 명은 한방 마사지 팩을 가져온다.
누워서 영화 보고, 맛있게 먹고, 피부 관리까지 한방에 해결하는 셈.
집에서 웰빙하기, 바로 인스피리언스(Insperience)족들의 생활 풍경이다.
글=최민우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 집에서 본다
지난 20일 이씨네 집 거실. 25평 남짓한, 그리 크지 않은 빌라에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20대 여성 세 명은 마냥 즐겁다. 우선 불을 다 끄고 '물랭루즈' DVD를 감상했다. 이어 저녁 식사. 친구 백혜선(25)씨가 가져온 쿠키와 파이가 나왔다. 백씨는 "그냥 돈을 아끼려고 집에서 해먹는 건 아니에요. 전 어머니랑 같이 음식을 만드는데 자연스레 모녀 간의 정도 더 돈독해지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말한다. 배가 든든해지자 세 명은 거실에 드러누워 서로 얼굴에 마사지 팩을 해주었다. 피부 관리는 또 다른 친구 노송(25)씨의 몫. 여드름 트러블이 많은 노씨가 최근 한방 병원에서 구입한 제품을 이용했다. 노씨는 "밖에 나가면 밥 한끼 먹는 데도 2만~3만원을 훌쩍 넘잖아요. 우린 그보다 싼 가격에 집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으니 자주 모일 수밖에 없죠"라고 말한다.
인스피어리언스족은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고립된 방콕족과는 다르다. 우선 '어울림'의 문화다. 단지 그 공간을 외부가 아닌 집안으로 옮겨왔다. 또 하나 '웰빙'이 빠지지 않는다. 재미있게 놀고 직접 해먹지만 인스턴트가 아닌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 집에서 먹는다
회사원 이지영(30)씨. 그는 친구들로부터 '요리 박사'로 통한다. 요리학원도 다녔고, 모 호텔 주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도 있다. 집엔 오븐은 기본이고, 케이크 틀과 크림을 만들 수 있는 휘퍼 등 다양한 요리 기구를 가지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자신의 솜씨를 한껏 자랑한다. 친구집에 놀러갈 때도 만화 캐릭터 모양으로 만든 쿠키를 만들어 가 인기를 톡톡히 얻고 있다. 남자 친구 생일날엔 케이크에 사랑이 가득 담긴 하트 문양과 글씨를 새겨 넣어 점수를 따기도 했다. "밖에서 사는 것만으론 내 개성을 보일 수 없잖아요. 정성을 보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집에서 만드는 것을 즐겨해요."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 서우석 교수는 "인스피어리언스족의 등장은 '개성의 세분화'를 의미한다.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외부에서 얻을 수 없는 '자기'만의 색깔을 강조하고픈 현대인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 집에서 찍는다
이제 태어난 지 세 달 된 아들이 있는 주부 장진아(31)씨는 요즘 육아일기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아기의 모습을 사진관으로 가져가 현상하지 않고, 최근 구입한 포토 프린터를 이용해 집에서 직접 뽑아 쓴다. 즉석에서 사진이 나오는 만큼 시간도 많이 절약됐다. "컴퓨터에 저장할 수도 있지만 훗날 아기가 커서 내가 손수 만든 이 책을 보면 감회가 더 새롭지 않겠어요.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것저것 모양을 많이 낸답니다."
가전업체도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비자들의 기호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HP 최인녕 이사는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을 작동시킬 수 있는, 한마디로 '기계치'도 집에서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홈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제품들이 최근 속속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인스피리언스족이란=내부(Indoor)와 경험(experience)의 합성어. '모든 것을 집안으로 옮겨라'는 뜻으로 최근 영국의 트렌드 전문사이트(trendwatching.com)가 소개했다. 가정에 최첨단 홈 시어터, 체육 시설, 커피 믹서, 스파 욕조 등을 설치하고 활용하는 경향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에서 도피해 편안한 안식처를 찾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