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BBK 편지 의혹’ 끝까지 파헤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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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경준씨와 미국 교도소에 함께 수감됐던 신모씨가 김씨에게 보낸 편지 등 모든 증거를 검찰에 제출하겠다.”

 17대 대통령선거를 닷새 앞둔 2007년 12월 14일. 홍준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이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획입국 의혹에 대한 수사를 의뢰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의 편지에는 “자네(김경준)가 ‘큰집’(노무현 정부를 지칭)하고 무슨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표심은 또 한번 출렁였다. 그러나 4년 반이 흐른 지금, 편지는 가짜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편지 조작’을 주도한 건 어떤 세력이었을까. 이제 필요한 것은 검찰의 분명한 수사 의지다.

 그간 검찰은 편지를 작성한 사람이 김씨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신경화씨가 아니라 그의 동생 신명씨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편지 전달 경로를 파악해 왔다. 그 결과 경희대 교직원 양승덕씨 등 여러 단계를 거쳐 홍준표 전 대표에게 건네진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홍 전 대표가 검찰에서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진술함으로써 마지막 연결 고리까지 밝혀졌다. 은 전 감사위원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법률지원단장과 BBK 대책팀장을 맡았다. 이에 따라 이 후보 캠프와 한나라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정치 공작을 벌인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편지 작성자인 신명씨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양씨로부터 이상득 전 의원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이 모든 걸 핸들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 후보 캠프의 핵심에 있던 은 전 감사위원이 편지 전달 경로에 있었다는 것은 신씨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낳고 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 자세는 미온적이란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앞서 검찰은 2008년 6월 “(기획입국 주장은) 정치적 논평에 불과하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측이 김씨 측을 접촉한 것이 사실”이라며 홍 전 대표 등을 무혐의 처리한 바 있다. 검찰은 어제 “은 전 감사위원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 조사했다”면서도 구체적인 조사 내용은 일절 함구했다. 수사팀이 관련자들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잠정 결론 내렸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는 검찰이 이번 사건을 단순한 형사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본다. 대선이 있을 때마다 “집권을 위해선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식의 ‘묻지마 폭로’와 정치 공작이 선거판을 어지럽혀 왔다. 공작에 손을 댔던 이들은 집권 후 ‘공신(功臣)’ ‘실세’로 떠오르곤 했다. 이번 사건을 유야무야로 넘긴다면 오는 12월 대선에서 후진적 선거문화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많은 국민은 최 전 위원장·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구속으로 이어진 파이시티 사건 수사를 계기로 검찰의 변화에 기대를 걸고 있다. 검찰은 ‘팔은 안쪽(집권당)으로 휜다’는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