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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굿바이! 피셔 디스카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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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결혼 후 이삿짐을 싼 횟수를 따져 보니 열 번에 가까워 온다. 남들처럼 운 좋게 아파트에 당첨된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재테크 목적으로 이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많은 횟수에 스스로도 깜짝 놀란다. 하기야 늦깎이 유학으로 나라 밖까지 짐 싸 들고 나갔다 들어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잡다한 이삿짐 속에 꼭 챙기는 것이 있다. 비싼 것도 귀한 것도 아니다. 중·고교 시절 배웠던 서너 권의 빛바랜 음악 교과서다. 음악책을 넘기면 그 속에 나의 십대가 고스란히 살아온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쓸쓸한 그 말이/ 오늘 문득 왜 이리 내 가슴을 치는가”로 시작하는 ‘로렐라이’와 ‘봄 처녀’, ‘켄터키 옛집’은 중2 책에 등장한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로 시작되는 ‘매기의 추억’도 중학 책이다. 고등학교 음악책은 중학교와 달리 3년 전 과정에 달랑 한 권뿐, 그러나 그 한 권을 통해 우리는 음악을 공부하고 꿈꾸고 노래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으로 시작되는 박태준의 ‘동무 생각’도 보이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사월의 노래’도 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의 ‘돌아오라 소렌토’를 목청껏 외칠 때만큼은 대입에 시달리던 십대들도 잠시 이국 정서에 젖었다. 그래서 대학 시절 미팅이라도 있을 때면 구태여 ‘소렌토’라는 이름의 양과자집이나 카페를 고집했던 기억도 새롭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를 두고 ‘울어 대던’이 맞다고 대들다 음악 선생에게 코피 나게 얻어터진 동창생도 있었다. 그뿐인가. 시절이 하수상하다 보니 ‘배우면서 지킨다’로 끝나는 학도호국단 노래도 눈에 띈다.

 그랬다. 음악책은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이 땅의 기성세대에게 선사했다. 곤고하고 암울했던 시절, 십대들은 그나마 억지로 지켜진 음악 수업 덕분에 베토벤을 듣고,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라는 묘한 이름의 음악을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라 밖 여행을 할 때마다 음악책에 등장하는 그곳을 찾아보는 편력을 하게 된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을 열심히 불렀지만 막상 콜로라도 덴버나 볼더, 애스펀에 가서는 그 노래를 아는 사람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조지아를 여행하면서 만난 ‘스와니 강’은 감격 그 자체였다.

 나의 음악 교과서 사랑은 세월을 따라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나 가끔 아내에게 크게 한판 혼난 경우 서재 방문을 닫고 음악책을 펴 든다. 대개 시작은 ‘봉숭아’다. ‘울 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의 노랫말이 아내에게 혼쭐난 나의 처지와 꼭 같지 않은가. 도니체티의 ‘남 몰래 흐르는 눈물’도 빠지지 않는다. 이렇게 한바탕 혼자 고래고래 소리치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진다. 나만의 스트레스 해결 비법, 조폭 같다는 나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까지는 꽤 효과를 보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노래 중 정말로 내 맘을 위무하는 노래는 ‘보리수(Lindenbaum)’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로 시작되는 ‘보리수’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 중 일부다. 원 제목은 뮐러의 시 ‘빈터라이제(Winterreise)’, 즉 ‘겨울여행’인데 무슨 영문인지 교과서에는 ‘겨울 나그네’로 나온다.

 멜랑콜리한 가사와 슈베르트 특유의 애잔함, 그리고 계절이 주는 쓸쓸함까지 녹아 있는 노래는 피셔 디스카우로 유명해졌다. 제럴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로 1976년 도이치 그라마폰에서 나온 음반은 디스카우를 전설적인 바리토노로 각인시킨 불후의 명곡이다. 그래서 아직 디스카우의 ‘겨울 나그네’를 능가하는 성악은 없다고 한다.

 ‘그대 여기 와서 안식을 찾아라’가 보리수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래서 ‘보리수’를 부르고 나면 대개 안식을 찾는 데 성공한다. 당연히 나의 스트레스 해소용 마지막 레퍼토리가 된다. 그제 오월, 피셔 디스카우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겨울 나그네’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는 이제 먼 길을 떠났고 봄날 또한 지나갔다. 굿 바이 ! 디스카우.

김동률 서강대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