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전직 대통령실장 왜 서면조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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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재수사 중인 검찰은 임태희·정정길 전 대통령실장에게 서면질의서를 보냈다고 그제 밝혔다. 재판을 받고 있던 이인규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 등의 가족에게 금일봉을 건넨 것으로 나타난 임 전 실장은 사찰 관련 증거인멸 과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정 전 실장의 경우 최근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 문건이 공개되면서 비선 보고를 받았는지 여부가 주목돼 왔다.

 검찰이 임·정 전 실장을 서면조사하기로 한 데는 이들을 피의자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서면조사는 형식상 필요하긴 하나 범죄 혐의가 있다고 의심하기 힘들 경우 사용하는 수사 방식이다. 정치적 예우를 할 필요가 있을 때 예외적으로 쓰이곤 한다. 검찰은 “일단 답변서 내용을 검토한 뒤 소환조사를 할지 정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실장들이 사찰 또는 증거인멸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미리 선을 긋는 자세는 온당치 않다. 설사 이들이 ‘단순 참고인’이라고 해도 두 사람에 대해서만 소환조사를 하지 않는 건 ‘법 앞의 평등’이란 원칙에 맞지 않는다. 청와대 윗선 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 의지가 빈약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두 달 전 검찰은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까지의 수사진행 상황을 보면 그 다짐과 거리가 멀다. 결국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 등 구속기소자 3명과 다른 사건(파이시티 비리)으로 구속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혐의를 확인하는 선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사건 은폐·축소 의혹이 불거진 당시 민정수석실 책임자였던 권재진 법무부 장관에 대해선 서면조사 계획도 없다고 한다. 이제 사건을 털기 위해 ‘모양 갖추기’ 수순에 들어간 양상이다. 이러고도 검찰이 국민에게 수사 결과를 믿으라고 할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