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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영화낚시]"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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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어느 시사 월간지에서 청탁을 받았다. "음, 이번 주제가 "글을 잘 쓰는 법" 이거든요. 그것에 관해 좀 써주셨으면 해요. " 이런 청탁은 난생 처음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글을 쓸만큼 글을 잘 쓰지 못하니 다른 분께 청탁을 하시지요. " 의례적인 겸양은 아니었는데, 어찌어찌 밀고 당기다 쓰게 되고 말았다.

머리털을 쥐어뜯다가 간신히 원고지 10매를 채웠는데, 골자는 연애편지를 적는 마음으로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연애편지는 독자가 정해져 있고 목표도 분명하다. 유일한 독자인 이성(異性)을 감복시켜 마음을 사로잡는 것. 이게 연애편지라는 글의 명쾌한 목표다.

또 연애편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수련에는 딱이다.

알고 있는 모든 감미로운 구절과 지식을 동원해 자신이 썩 괜찮은 인간이며 그러니 몇 번쯤 만나도 좋을, 더 나아가 한 번쯤 같이 살아도 문제 없으리라는 인상을 풍겨야만 한다.

단 몇 페이지의 글로 말이다. 미사여구만 나열한다고 감동이 오는 것도 아니다. 진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명쾌한 통찰, 그것이 깃들어야 연애편지로는 일급이다.

그야말로 한 판의 진검승부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글의 취지는 그러니까 연애편지처럼 타깃 독자와 저작 목표를 명확히 하라는 거였는데, 막상 써보내고 나니 좀 무책임한 충고였다.

따지고보면 연애편지처럼 어려운 글이 없기 때문이다.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야 최선이겠으나 받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가을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고독의 그림자를 드리울 때…" 같은 올드패션의 연애편지로 누구를 감동시키겠는가.

쓰는 사람이야 분명한 독자를 향해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썼겠으나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콧방귀도 안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연애편지가 진정 어려운 이유는 이 장르의 경쟁률이 너무 높다는 데 있다.

저 위로는 괴테 같은 시성부터 아래로는 코흘리개 초등학생까지, 그야말로 만인대 만인의 격전장, 그것이 연애편지다.

멜로 드라마의 운명도 비슷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낙랑공주가 북을 찢으며 사랑이냐 조국이냐 절규하고 있다.

가까이에선 한석규랑 '접속' 이 안되는 전도연이 즉석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고 사랑과 임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김윤진은 잠실운동장에서 총알세례를 받고 있다.

인류가 언어를 발명한 이래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치열한 '멜로상륙작전' 에서 무명용사로 스러져갔다.

멜로 드라마는,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새로운 '모순 '의 장르다. '나도 아내가…' 이 줄타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야기는 익숙하고 에피소드는 신선하다.

그러나 미사여구로만 이루어진 연애편지에 별 감동이 없듯 사회성과 불온함이 탈각된 멜로에서도 깊고 진한 여운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소설가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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