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男 "출근전 5시간 씻어…" 남모를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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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물이나 생각·숫자에 집착하는 것을 강박증이라 한다. 수건도 반드시 같은 크기로 접어야 불안하지 않다면 강박증을 의심해 볼 수 있다. [김수정 기자]

지난 15일 오전 9시. 서울대학교병원 3층 정신과 낮 병동(낮에만 입원하고 잠은 집에서 자는 병동)에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한 청년이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왔다. 간호사에게 90도로 인사를 하고 쇼파에 앉은 청년은 굉장히 예의바르게 보였다. 다음으로 단발머리를 한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학생,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차례로 치료실에 도착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강박증을 앓고 있다는 것. 한국인 100명 중 2명꼴로 앓고 있는 정신과 질환이다. 서울대병원 강박증클리닉 권준수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일반 정신병 환자가 비정상적인 생각을 하고,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쪽이라면, 강박증 환자는 그런 생각을 안으로 감춰 자책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더 많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치료를 받으러 온 환자 6명 모두 아주 예의 바르고 침착한 성향을 보였다. 눈빛·말투·행동 모두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집단 치료가 시작되자, 환자들의 입에선 힘겨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자신의 증상에 대해 말해볼까요?” 치료실 전문간호사가 말했다. 똑 부러지게 보이는 A(25)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시험스트레스가 심했던 고3 때 강박증이 시작됐어요 ”라고 말했다. 수건은 언제나 일정한 방향으로 접어 크기·모양이 자로 잰 듯 같아야 했다. 신발 역시 두 짝이 일렬로 놓여야 안심이 됐다. 시험 볼 때도 버릇이 생겼다. ‘①’과 같은 답에 체크 할 때 정확히 둥근 선에 맞춰 동그라미를 그렸다. 원을 그리는 방향도 반드시 시계방향이어야 했다. 대학에 와서는 숫자 5에 집착했다. 책 한군데가 찢기면 나머지 네 군데를 찢어 총 5군데가 돼야 마음이 편했다. 버스를 탔는데 5번째 누가 앉아 있으면 가슴이 뛰 고 손에 땀이 났다. 월요일에 집착해 중요한 일이 다른 요일에 있으면 극도로 불안해졌다. 그녀는 이제 이런 강박증을 누가 알까 불안하다고 말했다.

건장한 체격에 말쑥한 외모를 가진 B씨(남·31·회사원)가 말을 이었다. “저는 출근 전 씻는 시간이 5시간 정도 돼요. 미칠 것 같습니다”. 용변을 보기 전 변기 전체를 닦고, 샤워부스·수도꼭지도 씻는다. 머리부터 발톱·손톱 끝까지 이물질을 확인하고, 눈·콧속까지 씻는데 4시간이 훌쩍 넘는다. 수건도 이물질을 모두 떼야 닦을 수 있다. 여기에 1시간이 걸린다. 뿐만 아니다. 집에 와서는 바로 옷을 모두 벗어 빨래하고 몸을 씻어야 했다. B씨는 대학 재수 할 때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권준수 교수는 “강박증은 스트레스가 심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특정 숫자·요일에 집착하거나 손을 씻는 등 ‘강박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

강박증이 한국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예전에는 정신과질환 중에서도 소수에 속했던 질환이 이제는 전문클리닉이 생길 정도로 흔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강박증으로 치료받은 사람은 2007년 1만 8000명에서 2011년 2만 2628명으로 4년 새 26%가 늘었다. 권준수 교수는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가 강박증 환자를 양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나타나는 유형은 씻기 등의 ‘청결 강박증’이다. 그밖에 확인 강박증, 숫자 강박증 등이 있다.

강박증 환자는 어떤 생각이 반복해 떠오르고, 이를 없애려 특정 행동을 반복(강박행동)한다. 일을 꼼꼼하게 처리하고, 반복·확인하는 단순한 ‘강박적 성격’과 다르다. 또 강박행동으로 고통스럽고 불안해 하며,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정신병과 구분된다.

강박증 환자가 많지만 정작 주변에 눈에 띠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권준수 교수는 “자신의 증상을 숨기기 위해 말수를 줄이고, 행동 반경을 좁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숨쉬기 힘들어 가슴통증을 호소하고, 근육이 경직돼 나타나는 각종 신경통을 경험한다. 집에 가면 거의 녹초가 된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이다.

강박증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로 추정된다. 환자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특정 사건 후 본격적인 강박증상이 나타난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범희 교수는 “심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뇌 사고를 관장하는 부분의 신경전달회로의 기능이 저하된다”고 말했다. 감정을 조절하는 전두엽 부분도 작아진다. 유전적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아도 강박증에 취약한 유전자가 있으면 쉽게 질환으로 이어진다. 대부분 10대 후반부터 나타나며 성별이나 직업에 따른 유병률 차이는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강박증이 가져오는 사회·경제적 손실을 한해 800억 달러로 추정한다. 당뇨병·류마티스·심장질환·알코올중독 등과 더불어 세계 10대 장애질환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강박증이 사회문제가 된 미국에서는 강박증 치료를 위한 사회재단이 설립돼 기금을 모으고, 이들을 치료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배지영 기자

강박증이란=일을 꼼꼼하게 하고 반복·확인하는 단순한 ‘강박적 성격’과는 구별된다. 강박증 환자는 어떤 생각이나 이미지가 반복해 떠오르고, 이를 없애려 특정 행동(강박행동·손씻기 등)을 반복한다. 이로 인해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한편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정신병과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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