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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록리 김해 김씨 집성촌 … 한·일 우호관 세운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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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한일우호관. 관광객들이 김충선 장군의 밀랍인형을 보고 있다. [사진 달성군]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대구 수성구에서 청도군으로 가는 도로의 오른쪽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다. ‘사슴과 벗하는 마을’(友鹿里)이란 의미다. 이곳에 녹동서원이 있다. 그 옆으로 녹동사(사당)·충절관·관리동 등의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 중 현대식 건축물이 눈에 띈다. 입구에 ‘달성 한일우호관(韓日友好館)’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한일우호관이 최근 완공돼 관광객을 맞고 있다. 4198㎡ 땅에 지상 2층 규모로 50억원을 들였다. 정부에서 25억원을, 나머지는 대구시와 달성군이 절반씩 부담했다. 1층에는 조선시대 김충선(1571∼1642) 장군의 밀랍 인형과 그의 삶을 보여 주는 전시실이 있다. 또 일본과 한국의 교류사 등 한일 관계를 조명하는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건물 뒤 정원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일본의 문화를 보여 주는 각종 생활용품이 전시되고 있다.

김상보 건립 추진위원장

 산골 마을에 왜 이런 건물이 있을까. 이유는 김충선 장군이 일본의 장수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우선봉장(부사령관 격)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평소 예의를 아는 조선을 동경한 데다 임진왜란이 명분이 없는 전쟁이라는 점을 들어 500여 부하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의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나이는 21세였다. 사야가는 이후 왜군을 상대로 싸워 8차례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에게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란 이름을 하사한다. 임금이 내렸다고 해서 본관을 ‘사성(賜姓) 김해 김씨’로 정하고 시조가 됐다. 그는 이후에도 조총 제조법 등을 조선군에 전수했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도 공을 세웠다. 그는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한 뒤 산세가 좋은 우록리에 뿌리를 내렸다. 이 마을의 170여 가구(420여 명) 중 75가구(170여 명)가 김충선의 후손이다. 사성 김해 김씨는 18세에 걸쳐 전국에 7500여 명이 있다. 달성군 김봉식 관광개발팀장은 “김충선은 조선이 위기에 빠졌을 때 큰 공을 세운 충신”이라며 “그를 기리는 것은 후손의 의무”라고 말했다.

  김충선의 12세손인 김상보(64) 한일우호관 건립 추진위원장은 “한일우호관이 한·일 문화교류의 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찾는 관광객은 어느 정도인가.

 “일본인은 연간 3000여 명, 내국인은 5000여 명이다. 내국인은 주로 학생들이다.”

 -일본 관광객의 반응은.

 “일본인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시설이 있다는 점에 놀란다. ‘우리의 뿌리가 여기에도 있구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야가가 자랑스럽다는 반응도 많다.”

 -건립 목적은.

 “김충선을 널리 알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좀더 우호적으로 발전시키는 게 목적이다. 우리 젊은이들에겐 나라 사랑의 의미를 가르치는 역할도 할 것이다.”

 -앞으로 계획은.

 “수학여행단을 비롯한 일본 관광객 유치에 힘을 쏟겠다. 서로 만나야 가까워지지 않겠나. 우리 토속 음식을 이들에게 소개하는 일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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