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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좌파의 씻김굿 필요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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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호 02면

어이없고 안쓰럽다.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투표 말이다. ‘선거 부정’을 ‘선거 부실’이라고 강변하며 당내 파워게임에 몰두하는 장면에서 ‘사이비 진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개혁과 도덕성이라는 진보의 가치를 내팽개쳐서다.

이양수의 세상탐사

1970∼80년대에 데모깨나 했다는 이들이 모이면 늘 떠들썩하다. 머리 희끗희끗한 ‘쉰 세대’가 돼 세상 보는 눈도, 삶의 방식도 제각각이지만 변화와 참여의 열정은 화롯불의 불씨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름과 같음이 어지럽게 교차하다 보면 목소리를 높일 때가 많다. 하지만 요즘 진보당 부정투표 사건엔 이구동성이다. 이정희 전 대표 등 당권파 인사들에 대한 성토 발언 다음엔 한숨과 개탄이 잇따른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나?

80년대 중반부터 돌출한 주사파(主思派)와 종북주의는 운동권의 사생아 같은 존재였다. 80년대 중반 서울 소재 대학의 총학생회장을 했던 어느 친구는 “밤새 토론해서 결론을 내려 놓으면 주사파라는 애들이 뒤집어엎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라디오방송을 앵무새처럼 따라 했던 애들”이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이들의 가투(街鬪) 동원능력은 뛰어났다고 한다.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시절에 선악의 기준은 명쾌했다. 바로 ‘독재 타도’를 위한 전투력이었다.

종북 세력의 확장에는 진보진영의 책임도 크다. 주사파라는 걸 훈장처럼 내세울 때 진보진영에선 눈 감고 귀 막고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그들은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했다. 급기야 진보당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이석기 당선인이 “종북 운운하는데 종미(從美)가 훨씬 문제 되지 않나”라고 주장하는 현실이다. 주사파들은 북한의 3대 권력세습과 경제난, 인권 탄압 같은 문제에 대해선 ‘남북 화해와 협력의 시선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언급을 꺼린다. 민주통합당과 시민단체의 리더들을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지다 “지금 색깔 검증을 하는 거냐”는 거센 항의를 받곤 했다.

종북 좌파의 폐해는 막심하다. 그들은 ‘순수 진보’ ‘중도 진보’의 활동 공간을 선점한 채 반대쪽 보수·중도층을 결집시키는 촉매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또한 ‘게으른 진보’다. 북한 체제가 과거 30여 년간 철저히 실패한 과정을 내 일처럼 고민하지 않는다. 중국의 개혁·개방, 동서독 통일과정 등 격동하는 세계의 흐름도 외면해 왔다. 기껏해야 주체사상이란 낡은 틀로 세상을 해석하거나 ‘미국 음모론’만 되뇌었을 뿐이다.

이번 사태는 제3당인 진보당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12월 대선에서 야권연대를 꿈꾸는 민주통합당으로 불길이 옮겨붙을 가능성이 크다. 4·11 총선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공약이 민주당 후보들을 울렸다면, 12월 대선에선 종북 노선이 이념 논쟁을 가열시킬 수 있다. 보수진영과 중도층은 예민한 시선으로 두 당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 그럼에도 2007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였던 정동영 의원은 일찌감치 “진보당 문제에 대해선 언급을 안 해주는 게 동지, 동료로서의 예의”라고 말했다. 대선 주자임을 자처하는 문재인·손학규·김두관·정세균 같은 이도 일체 침묵한다. 마치 4·11 총선을 앞두고 ‘김용민 막말 파동’으로 곤욕을 치르던 상황과 비슷하다. 4·11 총선 현장에서 뛰었던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김용민 파동 당시 한명숙 지도부는 ‘사퇴 권고’를 발표하려 했지만 문재인·이해찬 쪽에서 말리는 바람에 그만뒀다”고 전했다. “‘나꼼수’가 민주당 위에 있다는 걸 절감했다”고 그는 토로했다.

남북 문제는 더 이상 낭만의 대상도, 실험의 대상도 아니다. 민주당 지도부가 나꼼수의 실패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서 반미·종북 노선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물밑으로 지역 조직을 만들며 세(勢) 불리기에 골몰할 때가 아니다. 종북 좌파를 머리 위에 얹어 놓고 대선을 치를 생각이 아니라면 먼저 종북 좌파의 씻김굿을 해야 한다. 진보당 당권파도 더 이상 ‘위장 진보’의 장막에 숨어선 안 된다. 차라리 자신들의 노선과 정책을 떳떳하게 밝히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게 공당(公黨) 정치인의 자세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종북 노선의 폐기를 선언하는 게 마땅하다. 그게 진보진영의 거듭남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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