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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 칼럼

일본공산당만큼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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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내 머리에 뿔 안 났지요?”

 첫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가 웃으며 물었다. 일본공산당 기관지 ‘신붕 아카하타(赤旗)’ 기자였다. 당연히 공산당원일 터였다. 그런데 뿔(つの)이라니. 잠깐 멈칫하다 깨달았다. 아하. 한국에선 공산주의자를 머리에 뿔난 괴물로 여기지 않느냐는 농담이었구나. 쓴웃음이 나왔다. 1997년 도쿄특파원 시절이었다. 대화가 끝날 무렵 그가 가방에서 책자를 꺼내 건넸다. 일본공산당 강령·규약집이었다. 전도에 열심인 종교인이 연상됐다.

 그해 9월엔 일본공산당의 제21차 당대회도 취재한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김대중 정부를 거쳐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2003년 6월 9일. 방일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 중의원 의장 주최 간담회에서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공산당 위원장에게 “한국에서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 한국에서 공산당과 교류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가장 먼저가 나일 것”이라고 말했다. 원론적인 말이고 맞는 말이다. 노무현은 자기 말을 지켰다. 2006년 9월 5일 시이 위원장이 일본공산당 당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나와 생각은 달라도 인정하고 설득·토론하고 더 많은 사람의 동의를 구하고 투표에도 부치는 게 민주주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룰(규칙)을 지키는 일이다. 일본공산당은 일제 시절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전후에는 의회민주주의를 지향해왔다. 2008년에만 55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게공선』의 작가 고바야시 다키지(1903~33)도 공산당원이었고,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문 끝에 숨졌다. 2004년에는 당 강령을 43년 만에 개정해 천황제·자위대를 사실상 용인하고 당이 목표로 삼던 ‘민주주의 혁명’을 ‘자본주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으로 바꾸는 등 유화노선으로 전환했다.

 올해 창당 90년을 맞이하지만 일본공산당은 여전히 소수당이다. 국회에서는 중의원 의원 9명, 참의원 의원 6명으로 제4당이다. 올해 3월 NHK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 지지율(2.6%)도 민주당(18.1%)·자민당(17.2%)에 한참 처진다. 4·11 총선에서의 통합진보당 정당득표율 10.3%와 비교해도 약세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일본공산당에서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 몇 가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자.

 우선, 정당의 존립 기반. 일본공산당은 전형적인 풀뿌리 정당이다. 어제 국제전화로 통화한 우에키 도시오 공산당 홍보보장은 “‘주민이 주인공’이라는 슬로건 아래 생활·의료·취업 등 지역민에 밀착된 활동을 활발히 펴고 있다”고 말했다. 시이 위원장이 “구청·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면 ‘정말 곤란하면 공산당과 의논하라’고 할 정도”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그 결과는? 일본 기초자치단체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제1당이다. “진보정당을 하려면 국민이 아니라 당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인식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돈 문제에서도 철저하다. 일본에도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 제도가 있다. 유독 공산당만 받지 않는다. ‘국민의 세금을 정당들이 나눠먹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는 이유에서다. 기업·이익단체의 자금도 안 받는다. 대신 기관지·잡지 수익, 당비, 개인기부금으로 충당한다. 통합진보당은 2002년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올해 1분기까지 300억원이 넘는 국고보조금을 받았다. 앞으로도 4년 동안 경상보조금·선거보조금을 합쳐 총 182억원을 받게 된다. 그런 처지에 선거부정·당권투쟁을 벌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꼴사납다.

 하나 더 있다. 원칙을 견지하는 태도다. 일본공산당은 원칙에 어긋나면 소련이든 중국이든 북한이든 가차없이 비판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거악(巨惡)의 붕괴를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에는 “언론이 체제를 비판하면 막지 말고 언론으로 대응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북한과는 1968년 일본공산당 방북단의 숙소를 북한 측이 도청한 사건을 계기로 금이 갔다. 아웅산 테러,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관계를 정리했다. 연평도 피격사건, 로켓 발사 때도 강하게 비판했다. 무언가 다르지 않은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던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불투명한 자세를 상기해보라.

 의회정치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면 통합진보당도 일본공산당 정도는 해야 한다. 요즘 세상에 좌파 정치인이라고 누가 머리에 뿔 났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다른 뿔이 보이는 건 어떡하나. 의회민주주의를 부정하려는 뿔이다. 그 뿔은 엉덩이에 나 있다. 국민들도 다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