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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대중문화계 키워드는 '향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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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김광석이 노래한 '서른 즈음에' 의 첫구절처럼 2000년이 또 하루 멀어져간다. 이제 넘길 달력도 몇 장 남지 않았다.

김광석의 가사처럼 '내뿜은 '담배연기에 회한을 실어 내뿜지 않더라도 누구나 한 해를 마감하는 아쉬움이 클 것이다.

2000년대를 여는 첫해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올해. 그러나 지난 1년 우리 대중문화계에선 옛날에 대한 아련한 추억, 즉 향수의 위력이 대단했다.

디지털 세상의 속도감에 대한 나름의 반발일 것이다.

하지만 3년 전 IMF 충격 이후 튀어나온 복고바람과 성격이 다르다. 드라마 '은실이' 나 악극 '며느리 설움' 류의 과거지향적 색깔이 아니다.

가난했던 옛날에서 애써 위안을 얻기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순수에서 새 힘을 찾으려는 기색이 뚜렷했다.

추억은 올해의 영화계를 끌어간 주요 코드의 하나로 작용했다.

1월 1일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 "나 돌아갈래" 를 외친 주인공 영호(설경구)의 절규가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군에 참여한 이후 줄곧 파괴되는 영호의 자아를 드러내지만 관객은 야생의 들꽃을 사랑했던 영호의 순박함을 결코 잊지 못한다.

연말에는 '불후의 명작' (심광진 감독)이 선보였다. 함중아의 '내게도 사랑이' 가 흐르고 서커스.반딧불 등이 녹아 있다.

완성도에선 호평을 받지 못했으나 성탄연휴에 전국 1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때묻지 않은 사랑을 환기시켰다.

올 최고의 히트작 '공동경비구역 JSA' 도 김광석의 애잔한 음성, 초코파이를 둘러싼 남북병사들의 익살스런 대화가 빠졌으면 부담스런 영화로 흘렀을 것. 흥행작 '동감' (김정권 감독)도 무선통신을 매개로 20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는 사랑을 그렸다.

주제.소재는 달라도 향수란 코드를 적절히 가미해 흥행에 성공했다. 이쯤 되면 향수는 일시적 감정이 아닌 어엿한 문화상품인 것이다.

가요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보다 디지털 기술을 활발하게 접목해 향수 선풍을 일으켰다.

'테크노 뽕짝' 의 대명사로 떠오른 이박사가 주인공격. '이히' '우리리리히' 등 즉흥성 추임새를 곁들이며 40~50대의 전유물이었던 소위 뽕짝을 10대까지 확산시켰다.

그만의 유쾌한 전자음 가락이 n세대에게도 통했다. 향수의 새로운 변모인 셈이다.

조성모도 예외는 아니다. '시인과 촌장' 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상반기 화제곡 '가시나무' 는 무려 1백65만장이 팔렸다.

2000년대 젊은이의 감성에 맞게 곡을 다듬은 기획력의 승리랄까. 이영애.김석훈 등 스타급 연기가 출연한 뮤직비디오의 공도 컸다.

MP3 사이트에서도 오래된 팝송.가요 등을 찾는 네티즌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외국의 상황도 엇비슷하다. 11월 중순 출시된 비틀스의 히트곡 모음집은 발매 5주만에 1천8백만장이나 팔렸다.

국내 판매량도 20만장을 넘어섰다. 디지털로 재편집하되 LP판에서 느낄 수 있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색을 최대한 되살렸다고 한다.

가요평론가 송기철씨는 "향수란 누구에게나 잠재된 보편적인 정서라 문화생산자 입장에서도 가장 안전한 장치" 라며 "시대와 상관 없이 내년에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올해의 향수 바람은 대중소설에서도 재현됐다. 그리움의 원천으로서 가없는 사랑을 자극한 '가시고기' (조창인), '국화꽃 향기' (김하인) 등. 드라마에선 '가을동화' 가 비슷한 정서를 구현했다.

대중의 얄팍한 감성에 호소한 측면도 있으나 불멸의 사랑을 희구하는 일반인을 대리만족시킨 것은 분명하다.

'가시고기' 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가을동화' 음반이 히트하는 등 향수의 장르간 결합도 두드러졌다.

'국화꽃…' 의 영화화가 결정됐으며 소설에 나오는 올드팝도 내년 1월 중순 음반으로 선보인다.

동창생을 찾아주는 인터넷 사이트 '아이 러브 스쿨' 의 약진도 놀랍다. 현재 회원수가 7백30만명을 돌파했다.

디지털 기술이 역으로 아날로그 정서를 부추긴 것이다. 때문에 세상은 디지털로 질주해도 '마음의 고향' 을 찾아가는 향수의 힘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기술이 그 돌파구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만 그 정서를 복고적.퇴영적 회상이 아닌 현실을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재창조하는 과제가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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