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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4.근심 없는 나무들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시간은 틀림없는 독극물이랍니다. 시간은 틀린 것을 마멸시키고 진실을 빛나게 하지요.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세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나는 눈 시퍼렇게 뜨고서 기회를 노릴 거요.

[일러스트=이용규]

나는 가온한테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잠언들을 쓸어 담기에 바빴다. 기억력이라면 남다른 나였지만 한 마디도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틈틈이 적어 두었다. 그걸 탁연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그렇게 사나흘쯤 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레가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 강도로 귀환해야 할 때가 되었다. 아쉽지만 가온과의 교감을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집착하지 않는 게 수행자의 미덕이니까.

사랑의 공동체인 이 마을은 평화로웠다. 상처받은 자들,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경교는 탁월한 위안이자 훌륭한 치유를 하고 있었다.

애초 불교가 해오던 그 일을 언제부턴가 하지 못하게 되자, 경교가 대신하고 있었다. 불교와 흡사하되 종교 본령에 충실한 경교가 지닌 수월성(秀越性)이 분명했다. 김승은 정치혁명을 하겠다지만 고려 불교계 역시 혁명이 필요하다.

종교개혁이어도 좋다. 왕실이나 귀족과 결탁하여 세속화된 불교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참 신앙으로 바로 잡아놓으면 된다. 한 마디로 보조국사 지눌과 원묘국사 요세가 주도한 결사운동(結社運動)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강도로 돌아가서 내가 매달려야 할 일을 찾은 셈이다. 그렇다. 감찰을 끝낸 내가 귀환할 때가 되었다.

나는 김승, 선사 소군과 상의하여 인보의 주검을 다비하기로 했다. 동굴 속에 넣어둔 인보의 주검은 그때까지도 상하지 않았다. 연근 우려낸 소주로 적셔서 얻은 효과였다. 나는 전 장군과 몇몇이서 조촐한 다비식을 치렀다.

장작더미 위에서 인보가 탄다. 이승에서 사는 동안 그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투덜대기를 좋아했었다. 불퉁거리면서도 그는 나를 그런대로 잘 받들었다. 설사 최이 집정이 선원사 대장도감에 심어놓은 간자라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저물녘 장작불이 꺼지고 그의 유골을 줍는다. 돌절구에 빻아 가루로 만들어 분골함에 담는다. 여기 올 때 살아서 말하던 인보를 돌아갈 때는 작은 분골함 하나에 담아 간다. 허망하다. 경교도들은 매장을 선호한다고 했다. 부활을 믿어서인 듯하다. 두 종교가 비슷해 보여도 세계관이 이처럼 다르다. 불교는 영혼과 신을 부인하지만 경교는 영혼과 신은 물론 부활까지 믿는다.

다비를 하고 돌아오니 탁연이 내 숙소에 와 있었다. 마루에는 경교문헌들과 복음서, 가온의 잠언집 권축본을 담은 오동나무 상자를 비롯해 여러 토산품 꾸러미들이 쌓여있었다. 내일 달구지에 싣고 나가 강도 가는 배로 가져갈 것들이라 했다.

“지밀 승정, 승정은 내가 왜 경교도가 되었는지 끝내 묻지 않을 작정이구려.”

탁연이 천천히 뜰을 거닐며 물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있었다.

“불교식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인연 따라 되었을 거라고?”

“경교가 불교와 그리 크게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경교가 불교용어를 빌려 쓰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고 고양된 삶을 추구하는 방편으로서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같다. 종교마다 각기 다른 세계관은 사실 살아있는 인간들이 끝내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기회가 되면 중국 남송 지역에 가보시오. 나는 십 여 년 전, 장강과 황하를 잇는 내륙운하를 거쳐 온 적이 있소.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노장사상과 불교와 융합하여 아주 새로운 철학 사조를 낳았소. 주자(朱子)라는 대학자가 집성하여 주자학이라고 일컫지요.”

“주자학요?”

나는 마루에서 일어섰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학설이었다.

“그래요. 불교에서 세계를 설명할 때 이(理)와 사(事)라는 개념을 쓰지요. 이판사판, 할 때 그 이와 사말입니다.”

“이는 본체이고 사는 현상이니까요.”

“그 이와 사에 착안하여 북송과 남송에서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기론(理氣論)적 세계관이 만들어집니다. 그를 바탕으로 성인(聖人)에 이르는 공부 체계를 집성한 학자가 주자여서 주자학이라고 합니다. 나는 주자학과 몽골 귀족들이 믿는 경교가 기존의 불교 판세를 뒤흔들어놓을 거라고 보오. 불교는 이미 서산에 기울었다오. 변화된 세상에 부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거요.”

경교의 파괴력은 충분히 봐서 안다. 하지만 주자학이 뭔지는 몰라도 수승한 진리를 담고 있는 불교가 그것들 때문에 도태된다고 보는 건 엄포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불교는 끄떡없을 만큼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 승정이 직접 가서 보세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만 멈춰 있으면 썩을 뿐이오.”

“스님께서는 주자학과 경교 중 경교를 선택하여 운명을 걸었다는 말씀인가요?”

“선택이 아니오. 그저 우리 앞에 온 것이오.”

“주자학도 곧 물 건너올 거 아니오?”

“전쟁이 끝나고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 그리 되겠지요.”

탁연의 예상이 맞을 것이었다. 중국에서 유행하는 것이면 백 년 안에 이 땅에 들어와 지층을 뒤흔들어놓기가 예사였으니까.

“어쨌든 이 마을이 경교를 받아들였다고 몽골군들이 보호해주지는 않을 거요.”

“우리는 몽골군의 보호를 받을 생각 없소. 그네들이 전부 경교도인 것도 아니고. 도가 행해질지 끊길지는 모두 때에 맞아야 하는 거니까요.”

나의 회의적인 예단에 탁연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탁연이 돌아가고 가온이 와서 저녁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다비식을 한 직후라서 식욕이 없었다. 나는 몇 술 뜨다말고 수저를 놓았다. 김승은 내 귀로에 동행하기로 한 전 장군에게 이것저것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나는 가온과 함께 쇠뿔바위 언덕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

서녘 하늘 가장자리로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 노을을 바라보며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순간들에 대해서 상념했다. 윤회하여 다시 이 자리에 온다 해도 이 순간은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순간에서 영원성을 본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늘에 별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천상의 별무리에 화답하고 싶었던 걸까. 지상에도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숲에서는 반딧불이가 날았다.

“지옥과 극락을 오간 보름간이었어.”

나는 깊은 물속 같은 어둠에 잠겨가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회상했다.

“마을은 본래 그대로였고 승정 어른의 마음이 오락가락한 거죠. 지옥과 극락이라고요? 보세요. 이 전란 중에도 새는 노래하고 이렇게 들꽃은 피어나잖아요.”

“그래 맞구나. 판각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이 마을에 가끔 내려와서 푹 쉬었다 가고 싶구나. 내가 경교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환영해줄 거지?”

나는 옆구리를 맞대고 앉은 가온에게서 아주 특별한 기운을 느낀다. 나는 지금껏 한 사람에게 이토록 강하게 끌리고 홀린 적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신념을 바꾸고 종교도 바꿀 수 있겠다 싶다. 가온한테 느끼는 이 기운을 어떻게 표현할까.

글은 말을 다 담아낼 수 없고 말은 뜻을 다 전할 수 없다. 봄날, 물오른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새순의 싱그러움을 아는가. 매순간 나날이 바뀌는 그 봄빛 말이다. 거기에 지혜로운 사람의 향기가 결합한 그런 기운이라고 해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이 느낌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가만히 눈을 감아본다. 그리고 가슴깊이 호흡한다. 살아가는 동안 이런 순간을 만나는 건 분명 행운이자 축복이다. 내가 다시 눈을 떠 창공을 우러르자, 여름밤 맑은 산 공기에 눈을 씻은 별들이 명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마을, 스님이 지켜줄 거잖아요.”

가온은 침묵을 깨고 속삭였다. 나는 그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몰랐었다. 지켜준다는 건 원형을 보존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내가 왜 이런 마을을 해코지하겠는가. 종파를 떠나 하늘 아래 이처럼 아름다운 공동체 마을은 영원토록 유지돼야만 한다.

마을에서의 마지막 밤을 나는 그렇게 차분하게 보냈다. 요란한 환송식도 없었고 섭섭함을 달래자며 이별주를 권하는 이도 없었다. 평온 속에서 새날이 밝았고 이른 조반을 먹자마자 검모포를 향해 떠났다. 김승은 강도로 가는 상선을 점검하느라 댓바람부터 항구에 나가 있다고 했다.

내 짐을 실은 달구지는 전 장군이 몰았다. 나는 판각 공방에서 말을 탔다. 탁연이 내 앞에서 성호를 그었다.

“보세요. 어제 저녁노을이 오늘 아침이슬로 영글었어요. 가만히 귀 기울여보세요. 활짝 열린 나팔꽃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와요.”

돌배나무 밑 기와담벼락을 휘감고 핀 메꽃을 보고서 가온이 내게 말했다. 어제 저녁노을과 오늘 아침이슬을 절묘하게 연결 짓는 거야말로 불교적인 사유였다. 나는 나팔꽃을 눈이 아리도록 쳐다보다가 문밖으로 나섰다. 가온은 사자견을 데리고 내 뒤를 좇았다.

“내 뒤에 타고 가련?”

나는 말 잔등을 짚어보였다.

“아뇨. 가다보면 아마 내가 탈 것이 있을 걸요.”

가온이 싱긋 웃었다. 가온은 삼거리 주막집까지 걸어서 왔다. 염소수염을 한 농부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맞았다.

“이 나귀가 제법 힘이 세어졌어. 우리 가온이가 타도 좋을 만큼.”

농부는 대추나무에 매어둔 앳된 나귀를 가온에게 건네주었다. 가온이 스스럼없이 나귀의 등에 탔다. 나귀가 종종걸음을 치며 앞으로 달렸다.

사자견이 컹컹 짖었다. 농부는 나귀가 새끼를 치자, 키워서 가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던 거고 오늘이 그날이었다. 그전에는 서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가온에게는 늘 이런 식의 일들이 벌어졌다.

나는 검모포에서 김승과 만났다. 김승은 내가 타고 갈 상선 한 척을 주선해놓고 있었다. 연안을 따라 항해하며 강도까지 오르내리는 상선이었다. 내려올 때 탔던 가네야마 강수의 배보다는 작았지만 세곡선 규모는 돼 보였다.

나는 김승과 가온에게 손을 들어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배에 올랐다. 김승과 가온 역시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뿐 더 할 말은 없었다. 그간 우리가 나눈 말들이 태산 같고 바다 같아서 더 추가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 장군과 나는 양광도와 경기도의 주요 항구들을 두루 거쳐 사흘 만에 염하로 진입했다. 더리미 선착장을 보자 한 달 전, 출항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고 인보가 그리워졌다. 나는 인보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배에서 내렸다.

선원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인보의 유골함과 바랑을 법당 부처님 앞에 바치고 향불을 피워 백팔 참회했다. 세상 만물이 무상하다지만 떠날 때 데리고 갔던 스승의 시자를 잃고 돌아왔으므로 어쨌든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49재에 친히 영가천도재를 지내주기로 맘먹었다.

“최이 집정에게 네가 직접 가서 해명해야겠구나.”

큰 절 세 번으로 복명하는 나에게 수기 스승이 이른 말씀이었다.

“스님께선 진작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수기 스승이 인보의 정체를 파악하고서도 무던하게 대했음을 직감했다. 수기 스승은 눈을 지그리며 왼손으로 염주를 굴렸다. 스승은 이처럼 웅숭깊은 분이었다. 나는 내가 김승의 마을이 보이는 바디고개에서 겪은 회오리바람과 시력상실, 인보의 죽음에 대해서 소상히 보고했다. 하지만 워낙 이상야릇한 변괴들이어서 헛소리로 들렸을 법하다.

“너랑 내가 같다면 내가 열반할 뻔했구나. 유도화나 경교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어라. 특히 최이 집정에게 말이다.”

수기 스승이 방문을 열쳐두고 대발을 쳐둔 처소 바깥 동정을 살피며 일렀다. 인보가 없으므로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 엿들을 사람도 없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냥 연꽃방죽에 빠져 죽은 걸로 하지요. 운이 사나우면 접시 물에도 숨통이 막혀 죽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우리가 안화사에 두고 왔던 경교문헌들과 바랑이 그곳에 가 있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스승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짐 꾸러미들이 사무소에 있느냐?”

“예.”

“내려가 보자.”

대장도감 사무소로 내려온 스승은 천기 스님만 남게 하고 대중들을 모두 물리쳤다. 나는 짐 꾸러미들을 풀었다. 당신의 바랑과 불에 타다만 경교문헌들을 보고 스승은 도리질을 쳤다. 김승의 판각 공방에서 대진국 성경을 번역하고 권축본으로 만든 복음서와 가온의 잠언집을 얼추 훑어보고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안화사에서 우리를 구해준 거지왕초와 고려 기병대가 모두 경교도들이었다는 얘기냐?”

“그렇습니다.”

“김승은 어떤 위인이던고?”

나는 임진년 부인사 장경각 소실 참사의 내막과 백부 유승단의 편지, 김승의 야심을 조목조목 설명해주었다. 선사 소군과 탁연, 버림받은 이들이 꾸려가는 공동체마을의 화평에 대해서도 과장 없이 고했다.

“선사 소군과 탁연이 그곳에 있었다고?”

복음서들을 들춰보던 천기 스님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너와 같이 온 그 사람, 지금 어딨는지 당장 알아봐라!”

수기 스승이 내게 황급히 명했다. 나는 사무소 문을 열고 나와 전 장군을 찾았다. 그의 행방이 묘연했다. 가까스로 그의 행방을 아는 스님을 만났다. 내가 수기 스승의 처소로 올라간 직후, 도성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절집을 나섰다는 거였다. 지금쯤이면 이미 도성에 들어섰을 터였다. 나는 사무소로 돌아와 그대로 고했다.

“그것 봐라. 널 따라온 목적이 따로 있었다.”

수기 스승이 특유의 매 눈을 번뜩였다.

“전추산 그 사람, 결이 고운 자입니다. 공연히 문제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지요.”

나는 마을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전 장군의 충직한 성품을 칭찬했다.

“누가 그 사람 성품을 문제 삼는 것이냐? 함부로 도성에 나대다가 최이 집정의 그물망에 걸려들까 우려해서지. 김승이란 자가 아무리 치밀하다 쳐도 최이 집정을 못 당해낸단 말이다. 불안해서 안 되겠다. 어서 말을 타고 진양부로 가서 집정께 복명하라. 김승이 보낸 토산품 넉넉히 챙겨가지고.”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스승은 나를 내몰았다. 나는 토산품들을 챙겨 말에 싣고 진양부로 달려갔다. 그 사이 전 장군이 지양을 접촉했을 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쌍둥이 형제가 운영하는 잡화점에 갔거나 일가친척을 찾았을 거였다.

별초군들이 삼엄하게 경비서고 있는 진양부 최이의 저택은 정원이 빼어났다. 최근에 완공된 최항의 저택과 이어진 원림은 궁궐 정원보다 넓고 화려했다. 짐바리를 실은 수레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이 나라 최고 권력과 금력을 쥐고 흔드는 최이, 최항 부자와 맞장을 떠보겠다고 벼르고 있는 김승이 가상했다.

최이는 도방에서 측근들과 회의를 하고 있었다. 상장군 주숙, 장군 김효정과 유경, 그리고 김준이라는 자도 끼어있었다. 나는 보좌에 앉아있는 최이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는 몇 달 사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푸르죽죽한 얼굴에 생기가 빠지고 눈빛이 흐려서 산송장 같기만 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비대했다.

“그래, 승정은 어디어디를 둘러보고 왔누?”

최이가 숨을 헐떡이며 가래 끓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남해 분사대장도감과 단속사, 완산주와 김승 공방을 둘러왔노라고 고했다.

“엊그제 다녀간 만종 스님한테 들었지. 남해 경판들은 어떻던가? 선원사 경판마냥 뒤틀렸던가?”

“일부 뒤틀렸지만 정안 공이 잘 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요새 남해 일대에 왜구들이 출몰하고 있어서 큰일이야. 전쟁 통에 교역이 시들해지고 해상 질서가 안 잡히니까 노략질을 한단 말야. 경판들이 도난당할까봐 걱정이야. 내가 눈 감기 전에 낙성식을 봐야 할 텐데.”

최이는 앉아서도 천리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도처에 심어둔 끄나풀들의 보고를 수시로 받기 때문이었다.

“황공한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뭔가?”

나는 인보가 변을 당한 일을 더듬거리며 고했다. 선원사에 유골함을 가지고 올라왔다고 이르며 최이의 눈치를 살폈다. 목침이라도 날아올까
봐 조바심이 들었다.

“그 스님이 객사할 팔자를 타고났었군 그래.”

최이는 달랑 그 한 마디뿐이었다. 불안하게 앉아있는 내게 최이가 다시 말했다.

“해인사에 장경각을 짓기로 했지. 가야산 각사마을에서 판각한 경판들과 남해 경판들을 거기에 진장할 거야. 승정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수기 도승통을 도와서 마무리 작업에 매진하오. 유종의 미가 중요하니까.”

최이는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내가 반배를 하고 물러나오자, 집사가 답례라며 선물 보따리를 건네주었다. 태자 저하를 뵙기 위해 진양부를 나서서 궁궐 쪽으로 오는데 뒤따라오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보셔요. 승정 어르신!”

여인은 내 말과 보조를 맞춰 걸으면서 앞을 보고 말했다. 보는 이가 있을까봐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나 말이오?”

“지양 아씨께서 이따 새참 무렵 고려산 흑련 마님 초당으로 와달랍니다. 새참 무렵 고려산 흑련 마님 초당!”

여인은 한 번 더 이르고 샛길로 빠져 모습을 감췄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급히 말을 몰았다. 아무 것도 몰랐던 예전에는 그토록 평화롭게만 보이던 도성이 더 이상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초리들이 구석구석에 박혔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 무지에서 온 태평이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본토를 버리고 숨어들어온 도읍지, 강도는 겉보기만 그랬지 깨진 유리파편들 천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뒷골이 당겼다.

태자 저하와 재회한 나는 김승의 혁명 준비를 알렸다. 그리고 최이 집정 부자 사이에 깊숙이 틈입한 지양의 존재, 안화사에서 만났던 고려 기마대, 최이 집정과 만종의 쌍두마차를 화약으로 공격한 괴한들이 김승의 점조직이라고 일렀다.

“나도 바다를 건너 토야라는 다루가치를 만났답니다. 최이의 측근들을 매수해 두었고요.”

태자의 그 말을 듣고 나는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았다. 꿈같이 비현실적인 일이 머잖아 실현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나는 부인사 장경각 참사의 비화에 대해서도 소상히 전했다. 태자는 그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하급 정치 모리배들은 백성들을 상대로 꼼수를 쓰지요. 사건을 조작하고 거짓 여론을 띄웁니다. 대중들은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다가도 공식화되면 결국 믿지요.”

“태자 저하, 그럼 몽골군이 태웠다고 적은 이규보 상국의 「대장각판 군신기고문」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나는 전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당대의 명문장가 이규보 상국은 최이 집정에게 이용당한 것이지요. 아마 조작된 건지 모르고 사실로 알고 썼을 겁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기록들이 역사로 남는다면 후대 사람들은 진실을 알아챌 여지가 없었다. 아무리 승자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지만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더 더워져서 얼음 띄운 오미자차를 연거푸 마셔댔다.

“막아내야 합니다. 아니, 저들을 잘라내야만 합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침착해요. 저들은 강하고 우리는 너무 약합니다. 지며리 준비하며 때를 기다려야지요. 시간은 틀림없는 독극물이랍니다. 시간은 틀린 것을 마멸시키고 진실을 빛나게 하지요.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는 세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나는 눈 시퍼렇게 뜨고서 기회를 노릴 거요.”

나는 태자 저하가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저하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저하의 대업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나이다.”

조만간 태자와 유경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궁궐을 나왔다. 이제 고려산 밑 흑련의 초당에서 지양을 만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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