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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PD의 주례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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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주철환
JTBC 콘텐트본부장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인 탤런트 유지인씨와 나는 학번이 같다. 지금 스튜디오에서 만나면 반갑게 악수를 나누지만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그녀는 별(스타)이었고 나는 풀(무명초)이었다. 한마디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돌이켜보니 그녀의 데뷔작 제목도 ‘그대의 찬 손’이었다.

 그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유. 우리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결혼식을 올렸다. 86년 10월 29일 수요일 오후 3시. 장소도 비슷했다. 그녀는 향군회관, 나는 공군회관. 물론 상대는 달랐다. 신혼여행 가서 TV뉴스를 보는데 유지인씨 결혼식 하객 중에 탤런트 정혜선씨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내 결혼식에도 와서 축하해주셨으니 그분이야말로 그날 최고로 바쁜 하루를 보낸 셈이다.

 ‘트로이카 유’와 정식으로 인사한 건 내가 방송사에 PD로 들어오고도 한참 후였다. 아무래도 이 말만큼은 해야겠는데 왠지 망설여진 데는 까닭이 있다. 그녀는 그때 이미 이혼을 한 후였던 거다. 겁 없게도 나는 이 희한한 연결고리를 기어이 노출하고야 만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대단한 인연이네요.” 그녀는 ‘쿨’했고 우리는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가 되었다.

 가깝게 지내던 연예인들의 파경 소식이 들릴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 출입하기도 까다로운 결혼식에 봉투까지 들고 가서 박수를 쳐주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갈라서다니. 그래선지 연예인 누가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면 옆에서 얄미운 말을 던지는 이가 종종 있다. “얼마나 갈까.” 오죽하면 나도 신문에 이런 칼럼까지 썼겠는가. “이혼하려거든 축의금을 반납하라.” 돈을 되찾고자 함이 아니라 오래오래 잘살기를 바라서다.

 시간은 건너뛰어 97년 11월 8일 토요일 오전 11시. 장소는 여의도웨딩홀. 40대 초반에 나는 느닷없이 주례로 데뷔한다. 신랑 권혁송군은 내가 ‘일밤’을 연출할 당시 무대감독 출신. 말이 감독이지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궂은 직종이다. 성실한 권 감독은 일찌감치 나를 주례로 캐스팅했다. 하지만 예식이 그렇게 빨리 찾아올 줄 주례는 미처 몰랐다. 솔직히 신랑인 그도 모르지 않았을까.

 주례 16년차라고 말하면 다들 적잖이 놀란다. 그동안 100 커플 이상이 내 앞에서 혼인서약을 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겠다, 어른을 공경하겠다,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겠다. 주례를 의뢰 받으면 나는 이 세 가지 약속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를 환기시킨다. 특히 맨 처음에 나오는 말이 무섭다. 어떠한 경우라도…어떠한 경우라도.

 헤어지는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드러난 건 대체로 네 글자다. 성격 차이. 아니 그걸 모르고 결혼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모름지기 주례는 신랑 신부에게 성격 차이를 이겨낼 자신이 있느냐고 반드시 물어야 한다. ‘예’라고 건성으로 답하면 ‘성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한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격이 되고, 성격은 운명이 된다.” 결국 좋은 생각이 좋은 운명을 만든다는 얘기다. 생각을 바꾸면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예비부부에게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시청하라고 권한다. 거기엔 부부가 갈라서는 온갖 사례가 즐비하다. 내가 눈여겨본 건 ‘말’ 때문에 빚어지는 불화다. 말의 왼쪽에는 소리가 있고 오른쪽엔 말씀이 있다. 말이 말씀으로 옮아가지 않고 소리로 추락하면 사이가 틀어진다. 소리 중에 부부 사이를 가장 위협하는 건 잔소리다. 잔소리는 대부분 헛소리다. 잔소리는 귀에만 들어갈 뿐 마음으로는 스며들지 않는다. 잔소리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따뜻함은 따분함으로 바뀐다. 이따금 뉴스를 어지럽히는 참혹한 사건 뒤에는 반드시 배우자, 혹은 부모의 잔소리가 있다는 통계를 허투루 보아선 안 된다.

 처음 주례를 시작할 무렵엔 예식장 직원으로부터 사회자 아니냐는 얘길 가끔 들었다. 요즘은 주례사님 맞느냐는 말을 듣는다. 그럴 때마다 국어 교사 출신답게 주례는 사람이고 주례사는 말씀이라고 친절히 가르쳐준다. 언제부턴가 주례사에 결혼수행평가항목을 추가했는데 취지는 3개월에 한 번 주례가 혼인생활이 원만하게 진행 중인지 눈과 귀로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생각, 말, 행동, 습관이 성격으로 굳어진 후 그 틈새가 벌어지기 전에 예방주사를 놓아주는 건 주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애프터서비스 아닐까.

주철환 JTBC 콘텐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