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만 명, 저 아까운 생명들 … 가슴 치는 이국종 “국회의 페이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을 구한 아주대 의대 이국종(43·사진) 교수의 꿈은 중증외상환자치료센터 건립이다. 이 센터를 만들어 작업하다 크게 다친 근로자나 교통사고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총알이 두 개 박히고 조직이 썩어 가던 석 선장을 살렸듯이…. 하지만 이 교수의 꿈이 멀어졌다. 국회와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 때문이다.

 회기 종료(5월 29일)를 한 달여 앞둔 18대 국회는 24일에도 정쟁을 하느라 이 교수의 꿈을 담은 응급의료법 개정안은 손대지도 않았다. 지난해 12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해 2월 법제사법위원회로 넘어갔지만 먼지만 쌓여 있다. 19대로 넘어가면 이 개정안은 자동 폐기된다. 이명박 대통령,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유력 정치인,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나서 중증외상치료센터 건립을 약속했지만 허사가 됐다.

 이 교수는 24일에도 만신창이가 된 환자의 피를 제거하고 꿰매고 파손된 장기(臟器)를 수습하느라 수술실에서 살았다. 이 교수는 “한국에 외상 의료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면 해마다 1만 명의 억울한 죽음을 막을 수 있는데…”라며 허탈해했다.

 그는 체념한 듯했다. 그는 “이 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장실 청소원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도 일을 그만두기 전에 끝까지 자기 일을 다하고 인수인계를 하고 떠난다. (법안 미처리는) 도덕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국회에 최루탄을 던지고 전기톱을 동원하던 그런 치열함을 보여야 한다. (응급의료법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데 국회의 페이크(fake·사기극)”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외상으로 3만 명이 숨지고 이 중 1만 명(35%)은 적절히 치료하면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환자다. 살릴 수 있는 환자의 사망률이 미국(15%)·캐나다(18%)·독일(20%)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응급의료법 개정안은 권역(대형)외상센터와 지역외상센터를 지정하고 행정·재정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담고 있다. 2010~2012년 한시적으로 연 2000억원으로 늘린 응급의료기금을 2017년까지 계속 늘리게 했다. 이 개정안이 물 건너감으로써 중증외상센터 설립 근거가 사라졌고 응급의료기금이 2009년 수준인 400억원으로 줄어 외상센터 재원이 사라졌다. 복지부는 올해 5곳의 중증외상센터를 지정하려 했으나 사실상 포기했다. 지난해 9월 도입한 응급환자헬기(닥터헬기) 2대의 운영비(연간 60억원)가 사라져 내년에는 운항하지 못하게 됐다. 소방방재청도 비상이다. 구조구급과 문성준 과장은 “응급의료기금이 안 오면 노후 구급차량 개선사업(지난해 168대 교체), 첨단 구조장비 도입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국회가 정쟁을 일삼느라 제대로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여야가 특별한 이견이 없어 통과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무부처인 복지부는 더 문제다. 감기약 수퍼판매법(약사법)은 전 부처가 매달렸으나 응급의료법은 있는 듯 없는 듯하며 챙기지 않았다.

◆중증외상센터=차에 깔리거나 추락하거나 총에 맞아 여러 개의 장기가 망가지거나 신체가 절단되는 등 외상을 입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 외상전문의·전문간호사 등의 인력과 장비가 필요하다. 정부는 전국 16곳에 한 곳당 80억원의 시설비와 연 30억원의 운영비를 지원하려다 없던 일이 됐다. 총격을 당한 미국 레이건 대통령, 애리조나주 기퍼즈 하원의원을 살린 곳도 외상센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