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나라경제 체질 약화시키는 가계부채의 덫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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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과도한 가계부채가 경제의 체질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킨다는 경고가 나왔다. 가계 빚 때문에 단기간에 금융위기가 빚어질 가능성은 작지만 중장기적으로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불황을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22일 한국은행이 내놓은 ‘부채경제학과 한국의 가계 및 정부부채’ 보고서는 가계 빚이 지금처럼 계속 늘어나면 성장을 둔화시키거나 침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도한 가계 빚이 소비 위축을 불러 경제를 일본식 유동성 함정과 장기불황에 빠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는 912조9000억원으로 전년 말보다 7.8% 늘었다. 가계 빚이 2005년 이후 연평균 9%씩 늘어난 것에 비하면 증가 속도가 줄었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보고서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상태에서 2008년 금융위기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당장 금융회사들의 대규모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발 금융위기의 위험은 크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 비은행권을 중심으로 저소득·저신용 계층의 대출이 빠르게 늘면서 가계 빚의 ‘질’이 나빠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지난해 신규 대출 가운데 연소득 3000만원 이하 계층의 비중이 커진 반면, 소득이 3000만원을 넘는 가계는 그 비중이 줄었다. 상대적으로 저소득 계층이 빚을 늘리고, 고소득 계층은 빚을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고 연체율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저소득층의 가계 빚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원리금 상환 부담 때문에 소비의 여력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소비 위축은 경기 회복을 더디게 할뿐더러 경기가 살아나도 빚부터 갚느라 소비가 늘지 않는 악순환을 낳는다. 자칫 잘못하면 가계부채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구조가 굳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계발 금융위기가 없다고 결코 안심할 일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저소득층의 소득을 늘려 원리금 상환 부담을 덜어주면서 가계 빚의 규모를 서서히 줄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