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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무모하다 했지만 … 앤디 워홀 혼자 보기 아깝잖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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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주변에 갤러리 형태의 병원을 열어 문화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눈앤아이안과 엄승룡 원장. 병원 내 갤러리에는 유명 미술작품 15점이 전시돼 있다.

팝 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 세계적인 사진작가 버트 스턴, 현대 조형미술계 거장 장 피에르 레이노의 작품을 강남역 사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남역 사거리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지만 변변한 화랑 하나 없어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있는 곳이 안과 병원이라는 것이다. 이 엉뚱한(?) 일을 벌인 사람은 엄승룡(51) 눈앤아이안과 원장이다. 18년간 4만여 명의 시력교정술을 할 정도로 안과 전문의로 손꼽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예술적 철학을 가진 컬렉터로 불린다.

송정 기자 , 사진=황정옥 기자

그림 그리다 작품 40점 수집으로 대리 만족

“미술을 좋아해 직접 그려도 보고 배워도 봤는데 어느 순간 한계를 느꼈죠. ‘내가 작가처럼 그릴 수 없다면 좋아하는 작품을 모아 대리 만족을 해보자’라고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엄 원장은 2000년부터 미술작품을 한 두 점 모았다. 지금까지 수집한 작품은 40여 점. 집과 갤러리의 수장고에 보관하던 작품 중 일부를 2008년 개업한 병원으로 옮겼다. 작품 전시를 위해 병원 면적의 절반 정도인 165㎡를 갤러리로 꾸몄다. 다른 병원들이 인테리어 차원에서 유명 작품 한 두 점을 걸어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작품이 돋보이도록 비추는 조명을 설치하는 등 병원 인테리어를 할 때부터 갤러리를 염두에 뒀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에 병원의 반을 갤러리로 꾸민 것을 보고 주변에서는 “무모하다”고 걱정했다. 여러 사람이 오가다 보면 작품이 훼손될 수도 있고 분실될 수 도 있다. 미술작품은 습도와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컬렉터들은 대부분 전문 갤러리에 보관하지 공개된 장소에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 원장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이 ‘작은 메세나’, 문화예술의 나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독점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작품을 저만 보면 아깝잖아요. 함께 봐야 좋죠.” 처음에는 작품의 질감까지 고스란히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작품을 전시했다. 그러나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사람이 늘면서 지금은 아크릴로 겉면을 씌웠다. “분실에 대한 걱정은 없느냐”고 묻자 “그만큼 미술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답한다. 경제적 가치로 따져봐도 20억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작품들이지만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오히려 “모조품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작품 선택 안목 기르려 주말마다 전시회 찾아

엄 원장에게는 작품을 고르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작품은 일단 보기 좋아야죠. 쉽게 얘기하면 화사하고 밝은 느낌의 그림이 좋아요. 제가 팝 아트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죠.” 작품을 선택할 때는 화랑이나 옥션보다는 직접 해외 작가에게 연락하거나 외국 갤러리와 개인 소장가를 통한다.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회도 빼놓지 않는다. 미국 사진작가 버트 스톤의 마릴린 먼로 작품은 국내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보고 미국에 사는 작가 측에 직접 연락해 컬렉션했다. 매달 크리스티 카달로그를 꼼꼼히 살피며 마음에 드는 작품은 표시해둔다.

 자신만의 ‘심미안’을 갖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말마다 전시회장을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매월 초에 전시회를 둘러보기 위해 미리 한달 계획을 짠다. 미술 전시회 사이트에서 기자와 평론가들의 평을 확인한 후 동선을 고려해 한 주는 삼청동, 다른 주는 강남, 또 다른 주는 시립미술관 방향 등으로 잡는다.

 최근에는 사진작품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여섯 작품을 모았다. 이 중에는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마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 포함돼 있다. 조금 더 수집하면 사진 작품으로만 갤러리를 꾸며볼 생각이다.

전시회 티켓 고객에 보내 작은 메세나 실천

문화예술을 공유하려는 엄 원장의 노력은 다양한 방면에서 이뤄지고 있다. 전시를 원하는 작가들에게는 갤러리를 빌려준다. 입소문이 나면서 작가들이 엄 원장에게 연락해 작품 전시를 논의한다. 또한 전시회와 공연·콘서트 장소에 고객을 초대한다. 2009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구스타프 클림트 전’ 땐 고객 200명에게 티켓을 두 장씩 보내줬다. 지난해 연말에는 고객들에게 임재범 콘서트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공연 티켓을 선물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문화와 예술을 나누는 엄 원장을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이 다소 따갑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러나 엄 원장은 “아니다”로 자신한다. 오히려 피아노를 전공한 부인을 예술적인 감각을 나눌 수 있는 든든한 파트너로 꼽는다. 작품을 고를 때는 늘 아내와 상의한다.

 그간의 노력을 세상이 알아주듯 최근 병원에 갤러리 컨셉트를 더한 곳이 늘고 있다. 엄 원장은 “처음 무모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갤러리 컨셉트를 내세운 안과와 성형외과가 여러 곳 문을 열어 반갑다”며 “그러나 단순히 보여주기나 마케팅 차원 보다는 진심으로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시력교정술과 미술작품 모두를 통해 드러나는 표면적인 현상만 보지 말고 진실을 볼 수 있는 심미안을 가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엄승룡의 컬렉션

버트 스톤의 ‘마릴린 먼로(The Last Sitting)’

1962년 마릴린 먼로가 사망하기 6주 전 보그 잡지에 싣기 위해 촬영한 작품. 버트 스톤은 당시 LA 벨에어 호텔에서 마릴린 먼로의 사진 2571장을 촬영했고 이 중 62점을 골라 『더 라스트 시팅(The Last Sitting)』을 펴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마릴린 먼로는 담낭 수술을 한 직후였다. 수술 흔적이 사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김동유 작가의
‘마릴린 먼로&클라크 케이블’

‘이중 그림’ ‘얼굴 속의 얼굴’로 유명한 김동유 작가의 작품. 김 작가는 조그마한 크기의 인물화를 여러 개 조합해 또 다른 인물화로 변신하는 특유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작품은 멀리서 보면 마릴린 먼로의 매혹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1939년 개봉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우 클라크 케이블의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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