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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년 전 회갑날 … 만해가 읊은 ‘붉은 마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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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39년 7월 12일. 서울 동대문 밖 청량사(淸凉寺)에서 조촐한 회갑연이 준비됐다.

 이날 주인공은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시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사진). 독립운동가 박광(1882~?)과 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碧初) 홍명희(1888~1968)가 주선한 회갑연은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라 규모가 크지는 못했다. 장소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알음알음으로 공유했다. 만해 선생을 비롯해 16명이 둘러앉았다. 점심 나절 회갑연이 끝나고 벽초 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만해 선생의 제자 해어(海於) 김관호에게 “김군이 얼른 진고개에 가서 서첩 하나를 사오게”라고 말했다. 서첩이 도착하자 연장자인 우당(憂堂) 권동진(독립운동가·1861~1947)이 먼저 붓을 들었다. 우당은 A3 사이즈 서첩 가득히 ‘卍(만)’이라고 적었다. 스님이자 시인이던 만해 선생의 호를 적은 것이다. 그는 만 가지 바다를 뜻하는 만해(萬海)를 호로 썼는데 만해(卍海)로도 썼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회갑연 즉흥시. 붓을 눌러쓴 특유의 필체에서 힘이 느껴진다.

 이날 참석자들은 대부분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우당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이 붓을 잡았다. 석정(石丁) 안종원(1874~1951), 지오(池吾) 이경희(1880~1949) 선생이 만해 선생의 회갑연을 기념해 글을 남겼다. 서첩 마지막 페이지는 만해 선생이 즉흥시로 채웠다. 그는 붓을 손으로 꾹 눌러쓰는 특유의 필체로 한시를 써내려 갔다. 한시의 첫 행에 등장하는 일(一)자는 곧고 강직한 만해 선생의 신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환갑을 맞이하는 심정을 ‘붉은 마음(丹心)’으로 표현했다. ‘세월 흘러 흰머리는 짧아졌지만 풍상도 이 붉은 마음은 어쩌지 못해’라고 읊었다.

서예가 겸 독립운동가 위창(葦滄) 오세창은 전서(篆書)로 ‘수자상(壽者相)’이라고 썼다. ‘오래 살라’는 뜻이다. [사진 옥션 단]

 이런 사연을 담은 ‘만해선생수연첩(萬海先生壽宴帖)’이 6~12일 서울 안국동 갤러리 단 전시장에서 공개된다.

그간 존재는 알려졌지만 실물이 일반에게 소개되기는 처음이다. 조국 독립에 대한 만해의 열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회갑연을 함께했던 이들 16명의 운명은 한반도의 격랑을 타고 극적으로 갈렸다.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활약하다 옥고를 치른 위창에게는 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됐다. 또 다른 7명에게는 독립운동의 공이 인정돼 훈장이 추서됐다. 반면 벽초는 1948년 월북했다. 만해 선생은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5월 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만해선생수연첩’은 13일 경매(추정가 2억원)에 부쳐진다. 원교(圓嶠) 이광사(1705~77)의 서화첩(書畵帖), 위창 선생의 인장 153과(顆) 등 서예 및 미술품 269점도 함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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