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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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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주철환
JTBC 편성본부장

새봄의 교정은 활기차고 분주하다. 종종걸음 위로 각종 현수막이 나풀거린다. 게시판마다 취업정보와 동아리 소개, 각종 동문회 모임을 알리는 소식들로 빼곡하다. 눈길 한번 안 주고 지나치는 무관심과 광고까지 찬찬히 읽는 호기심이 한 공간 안에 있다. 그 다양한 풍경이 낯설지 않다.

 인연은 추억보다 대체로 힘이 세다. 온갖 통신수단을 활용해 동문회장은 얼굴을 비추라고 끈질기게 조른다. 그 정성이 갸륵하다. 덕분에 큰맘 먹고 모교 앞 주점으로 나들이 간 게 금요일 저녁이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심사가 묘했다.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자리였는데 놀라지 마시라. 새내기들이 무려 38년 후배였다. 아, 저 뽀얀 피부. 더불어 변화의 가능성. 너희들도 늙어가겠구나.

 드라마는 자연스레 흑백화면으로 이어진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자 선배들은 다짜고짜 노래를 청했다. 수줍어하는 나에게 숟가락 장단으로 공격하던 그 장면. “노래야 나오너라 쿵짜자 쿵짜.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자 쿵짜. 엽전 열닷 냥.” 아마도 나는 그때 두 가지 중 하나였지 싶다. 철이 없거나 주관이 뚜렷하거나. 아무튼 그 열기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노래로 분위기를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아무도 내 노래를 따라 하지 않았고 곧이어 쳐들어온 건 답가가 아니라 넘치는 술잔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도 한동안은 교복을 입고 다녔다. 비슷한 친구가 여럿이었다. 국문과는 35명 입학정원이었는데 6명이 여학생이었다. 옥지, 영란이, 광자, 정숙이, 혜숙이, 정례. 특징만 말한다면 누나 같은 옥지, 새침데기 영란이, 공부 잘하는 광자, 불교에 심취한 정숙이, 졸음이 많은 혜숙이, 시큰둥한 정례, 대충 이랬다.

 오늘은 정례가 주인공이다. 이화여고 문예반장 출신인데 전반적으로 냉소적이었다. 소설기술론 시간에 과제물로 제출한 습작을 곁눈질했는데 시작부터가 음울한 이야기여서 그녀의 ‘삐뚤어진’ 심성을 가늠케 했다. 그래도 나와는 대화가 잘 통했다. 맞짱을 뜨기보다는 맞장구치기가 유익하다는 나의 ‘비겁한’ 처세술은 그때부터 서서히 형성돼 간 듯하다.

 학과의 특성상 글깨나 쓴다는 아이가 몇 있었다. 정례도 그중 하나였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시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보기에 인생 참 어렵게 사는 족속이었다. 나도 백일장에 나가 상까지 받았던 이력의 소유자인데 걔들 앞에선 한참 역부족이었다. 가는 길이 달랐다. 난 성급하게 붓을 꺾었다. ‘넌 동화를 쓰면 좋겠다’는 정한숙 교수의 조언이 결정타였다. 지금도 내가 즐겨 낭송하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중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부분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미래의 시인들이 시를 짓는 동안 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렇다. 그들에겐 시상이 꿈틀댔지만 나에겐 악상이 헤엄쳐 다녔다. 예나 지금이나 시는 읽는 것이지만 노래는 부르는 것이다. 돌아보니 내가 노래를 부른 건 실은 친구를 부른 것이었다. 지난번 내가 마련한 음악회 때 노래 사이사이에 객석에 앉은 친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는데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나와 친구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게 고마웠고 나를 기억해 먼 데까지 찾아와준 게 감사했고 지루할 수도 있는 내 노래를 인내하며 들어주는 그들이 사랑스러웠다.

 화면은 컬러로 넘어간다. 38년의 시간이 주말의 명화 분량으로 편집된 것이다. 밤은 이슥하고 후배들은 많이 취했다. 술에 취하고 노래에 취했다. 실은 정에 취한 것이리라. 그럴 땐 우산 잘 챙기라는 말조차 잔소리에 불과하다. 지나가는 비쯤이야 몸을 적신들 어떠하랴.

 마지막 반전. 어려운 시를 써서 무게를 잡던 정례는 그 후 등단해 시인이 됐고 가벼운 노래를 지어 부르던 나는 방송사 PD가 됐다. 정례는 가끔 남의 시를 자기 방식으로 풀어주는데 그 해설조차 내겐 난해하게 다가오기 일쑤다. 이제 잠깐 눈을 돌려 왼쪽을 보기 바란다. ‘시가 있는 아침’을 연재하는 시인 최정례. 그녀가 바로 그 시절 불만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세상을 노려보던 그 정례다. 친구여, 세월은 무정한데 그대는 한결같구나.

주철환 JTBC 편성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