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천지에 빈 데는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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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정선구
산업부장

#1. 중견기업 회장 Q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래를 보는 귀신’으로 통한다. 그는 남들이 하는 것과 정반대로 한다. 몇몇 부자가 매물로 나온 일본 골프장에 눈독을 들일 때 엔화에 투자하는 식이다. 지금이야 엔고(高)가 주춤하고 있지만, 한참 동안 엔화 가치가 올랐을 때 큰 재미를 봤다. Q씨는 은행과 증권사에도 투자해 봤고, 국내 굴지의 기업들 지분도 사들였다가 되판 경험이 있다. 잘 알고 지내는 최고경영자(CEO)는 “Q씨처럼 혜안이 있는 분을 보지 못했다. 그를 신처럼 모신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을 정도다.

 #2. 현대백화점그룹 경청호 총괄 부회장은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두 군데 직장에 합격했다. 한 곳은 현대, 다른 한 곳은 대한항공. 고민 끝에 그가 입사를 최종 결정한 곳은 현대였다. 현대를 택한 그의 이유가 싱겁다.

 “대한항공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녀야 했지. 현대는 점퍼 차림이면 됐고.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현대는 식사를 제공해 주더라 이거야. 충청도 시골 촌놈에게 당장 먹을 것을 주는 데야….”

 소설가 이윤기 선생은 2010년 8월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천지에 빈 데는 없다’라는 생애 마지막 신문 칼럼을 게재했다. 소설가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썼다. 만약 원고료와 인세를 많이 받아 부자가 됐다면 천재나 수재가 몰려들어 자기 자리를 차지해 버릴 거고, 그러면 천재도 수재도 아닌 자신은 보따리를 싸는 수밖에. 택시기사 사례도 미안함을 전제로 꺼냈다. 택시기사 수입이 턱없이 많아진다면 고급 인력이 밀려와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천지 자연엔 빈 데가 없다고 했다.

 이윤기 선생의 주장은 스스로 칼럼에서 밝혔듯이 노자(老子)의 말씀 상선약수(上善若水) 논리다. ‘으뜸된 선은 물과 같다’, 즉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자 노자의 깊은 뜻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문맥 그대로만 놓고 거꾸로 해석해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중견기업 Q회장처럼 시장을 예측하는 고수가 되고 싶고, 경청호 부회장처럼 사회에서 큰 성공을 꿈꾼다면 분명 천지에 빈 데는 있다. 아래가 아닌 위를 쳐다본다면, 남들과 크게 다른 성과를 내서 발전을 이루겠다면 또 다른 이야기다. 귀신 같은 혜안이 있다는 Q회장처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옆 자리는 확실히 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사람이 있으며, 그의 기막힌 비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세상 천지에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 속에서 진짜 고수는 그저 숨어 있을 뿐이다.

 경청호 부회장은 현대라는 직장을 선택해 지금 월급쟁이로서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저 옷 차림새가 편해서, 밥을 주니까라는 이유로 현대를 택했다지만 얼마나 망설였을까. 그 고민 끝에 고른 현대라는 직장이 만만치는 않았을 게다. 좌절하지 않고 안이함을 버리며, 개인과 조직의 발전을 위해 늘 진화하는 삶을 살았다. 경 부회장을 비롯해 다른 기업의 성공한 전문경영인들은 그 자리가 어떤 이유로든 비어 있었기에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경 부회장이 택하지 않은 대한항공 자리에도 누군가 들어섰을 테고, 그 누군가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대한항공 경영자가 됐을 것이다.

 몽골의 영웅 테무친(칭기즈칸)이 라이벌 자무카와 일생일대의 결전을 벌였을 때다. 마침 아찔할 정도의 번개가 번뜩였다. 자무카의 병사들은 번개를 무서워해 속절없이 테무친 부대에 당했다. 패장 자무카가 테무친에게 물었다. “모든 몽골인들은 번개를 무서워하는데 자넨 왜 번개를 무서워하지 않는가.” 그러자 테무친은 이렇게 대답했다. “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네. 맞서니 두려울 것이 없더군.”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야 천지에 빈 데는 없다. 그러나 도전을 꿈꾼다면 빈 데는 분명 있다.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도 “천지 자연은 빈 데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걸 우선하며 “빈 데를 용납한다면 새로운 세상이 언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했다. 변화와 발전의 위를 지향한다면 빈 데는 있다. 물은 늘 아래로만 흘러 빈 데를 채우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