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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혼자 외출하면 미안해하지만 난 오히려 '생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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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토요일 오전,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은 필라테스를 하며 한 주 동안 쌓인 피로를 푼다. 최 단장은 “50분 수업을 하고 나면 땀이 쏙 난다. 주중엔 내가 발레를 가르치지만, 이곳에서는 뭔가 배울 수 있다는 게 좋다”고 말한다. [박종근 기자]

주말에는 ‘계급장’이 없습니다. 큰 기업 회장님과 중소기업 대리도, 학교 선생님·의사 선생님도 다 비슷해집니다. 강변에서 자전거를 탈 때에는 수많은 자전거족(族)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가족과 극장을 찾을 때는 그냥 관객입니다. 편안한 차림으로 대형 마트를 찾았을 때에는 한 명의 동네 사람이 되고요. 일에서 잠시 벗어나 내 취향과 방식에 따라 새로운 에너지를 채우는 휴식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 ‘나의 아름다운 주말’을 시작합니다. 각계 명사들이 쉬는 법, 소소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주말 얘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첫 주인공은 최태지(53) 국립발레단장입니다.

‘OFF ’. 알람을 끈다. 금요일 밤, 나는 짜릿함을 느낀다. 일종의 해방감이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 지난해부터 주말 공연이 잦아지면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모처럼 주말 공연도 없으니 오늘 밤만큼은 잠들며 긴장할 이유가 없다. 주중에는 잠들 때도 조마조마했다. 보통 오전 7시쯤 잡히는 조찬 모임이나 강연에 늦을까 걱정됐다. 내친김에 휴대전화까지 꺼둔다. 왠지 이번 주말엔 나를 찾을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설레기까지 한 ‘주말 전야’, 48시간의 완전한 자유는 이제부터 ‘ON’이다.

화장 생략하고 필라테스장으로

최태지

 토요일 아침, 눈을 뜨니 시곗바늘이 오전 10시를 가리킨다. 남편(임준호·55·인하대 로스쿨 교수)은 곁에 없다. 골프를 가지 않았다면 토요일엔 혹여 내가 깰까 혼자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부엌으로 가서 주스부터 만든다. 아침 대용이다. 발레를 시작할 때부터 아침은 늘 이런 식이다. 아침을 너무 든든히 먹으면 하루 종일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대신 비타민C가 많다는 당근·키위·딸기 등을 갈아 주스로 마신다. 두유도 별식처럼 가끔 먹는다. 다행히 남편도 이를 즐긴다. 좀 허전하다 싶으면 주스에 샐러드를 더하는 정도다.

 공복만 달래고 외출 준비를 서두른다. 까딱하다간 오전 11시에 예약해 둔 필라테스 수업에 늦겠다 싶다. 화장은 생략. 운동화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차에 오른다. 주말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정장 차림을 하거나 하이힐을 신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전홍조 아트필라테스에 다닌 지는 벌써 4년째. 50대가 되면서 몸이 확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현역 무용수 일을 그만두고도 40대까지는 꽤 자신감이 있었는데 순식간에 탄력이 줄고 근육도 급속히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살이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랄까. 요가에 근력운동을 더한 필라테스는 그런 점에서 딱 맞았다. 더구나 주중 내내 단원들을 가르치고 일반인들에게 발레를 강의하는 내가 여기 와서는 뭔가 ‘배울 수’ 있다는 게 좋다. 발레를 했으니 필라테스도 쉬울 거라고? 천만의 말씀. 다리를 벌리는 각도, 허리의 뒤틀림같이 세세한 자세 하나하나를 제대로 하기 힘들다. 50분 수업을 마치고 나면 땀이 쏙 난다. 그 또한 늘 차로 움직이고 사무실에만 있는 내게는 큰 즐거움이다.

남편과 호젓하게 시간 보내기

 운동이 끝날 때쯤 남편이 찾아온다. 함께 브런치를 먹기 위해서다. 가끔 인터넷으로 맛집을 검색해 놓고 찾아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평일처럼 긴장하지 않은 채로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밥을 먹는 즐거움도 있다. 이럴 때면 일에 대한 얘기는 줄이려 한다. 다음엔 어느 식당을 가 볼까, 올 휴가는 어디로 갈까 등 ‘휴일 맞춤형’ 주제로 이야기하며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서울 청담동의 테이스팅룸·퀸즈파크는 우리 부부가 즐겨 찾는 곳이다. 테이스팅룸에선 손으로 먹음직스럽게 채소를 찢어 놓은 시저샐러드, 루콜라가 많이 올라간 플랫 브레드 피자에 아이스크림과 쿠키를 으깨 버무린 디저트까지 먹는다. 퀸즈파크에 갈 땐 창가 쪽에 앉는 게 좋다. 통유리창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즐기며 신선한 빵과 주스를 즐기는 기분이란!

 브런치를 양식으로만 하라는 법도 없다. ‘토담골’의 돌솥 비빔밥, ‘새벽집’의 육회비빔밥 같은 한 그릇 음식도 좋다. 주변에선 왜 일식을 안 먹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사실 나이 드니까 차가운 회를 점점 멀리하게 된다. 이젠 몸에서 뭔가 뜨끈하고 신선하고 그런 걸 원하는 것 같다.

 배를 채우고 나선 영화관에 곧잘 간다. 딱히 계획해서가 아니다. 브런치를 먹다가 둘 중 하나가 ‘볼까?’ 하는 식이다. 스케줄에 없던 일을 즉석으로 해 보는 재미다. 집 근처에 있는 용산CGV나 식당 근처인 압구정CGV를 주로 간다. 최근 그렇게 본 영화들이 ‘부러진 화살’ ‘범죄와의 전쟁’ ‘마이웨이’다. 한국 영화를 주로 보는 건 자막조차 집중하고 싶지 않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다. 이제 날씨가 풀리면 자전거를 탈 생각이다. 한강 둔치로 나가 한남대교에서 잠실까지 가면 적당히 땀이 나는 코스다.

 토요일 늦은 오후, 꼭 가야 할 곳은 대형마트다. 장보기는 아주 평범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언젠가 주말 장보기를 건너뛰었더니 한 주 내내 냉장고에 생수밖에 없던 적도 있었다. 주스용 채소나 과일, 두유로 카트를 반쯤 채우고 저녁에 요리할 생선·고기도 고른다. 주말에 자장면·치킨을 배달해 먹는 것만큼은 하지 않는다. 뜨거운 밥에 무국·생선구이·나물로 차려진 단출한 한 끼가 백배 만족스럽다. 여기에 요즘엔 멸치볶음도 빼놓지 않는다. 하루 20마리는 꼭 챙겨 먹는다. 발레를 한 사람들은 무릎 연골이 보통 사람보다 좋지 않기 때문에 칼슘 보충에 더 신경이 쓰인다.

일요일은 가끔 혼자 놀기

 남편은 가끔 주말에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재로선 반대다. 난 주말만큼은 남편 외에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혼자라는 게 좋다. 주중에 늘 많은 이를 상대하고 있어서다. 오전 7시부터 포럼·오찬을 하는 건 기본이요, 조찬 모임, 언론매체 인터뷰, 단원들 리허설, 후원사와의 미팅까지 스케줄이 빡빡하다. 발레단이 공연도 많아지고 후원도 많아지면서 미팅 자리가 늘고 있다. 숙원사업인 발레학교 설립을 위해, 또 표 한 장이라도 더 팔려면 열심히 뛰어야 한다. 그러니 주말까지 ‘이벤트’를 잡는 건 무리다.

 예외가 있다면 딱 하나다. 외국에 나가 있는 딸들(큰딸 최리나는 러시아 보리스에이프만발레단의 솔리스트이고, 작은 딸 세나는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이 방학에 들어올 때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이게 되면 바람을 쐬러 교외로 나가기도 한다.

 일요일에 남편 혼자 약속을 잡을 때가 있다. 외출하면서 미안해하지만 난 오히려 ‘생큐’다. ‘혼자 놀기’도 재미있기 때문이다. ‘해를 품은 달’ 같은 인기 드라마를 10편씩 몰아 보는 행복을 누가 알까. 주말만큼은 나도 보통 아줌마다. TV 보면서 끼니도 초간단메뉴로 때운다. 밥에다 전날 만든 나물을 넣고 고추장을 섞으면 끝이다.

그러다 심심해지면 집 근처 카페로 간다. 한남동 집 근처의 파리크라상·기욤은 주말에도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거기서 혼자 페퍼민트 차를 시켜 놓고 옆 테이블의 얘기를 엿듣곤 한다.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 등 트렌드를 알아보기 좋은 기회다. 발레가 사랑받으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제가 뭔지 알고, 좀 더 대중성을 갖춘 무대로 만들어야 하니까. 가끔 찜질방 에 가서 삶은 계란과 식혜를 사 먹으며 동년배 주부들을 만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깔깔거리는 수다만 들어도 에너지를 얻는 듯하다.

 혼자 서점에 갈 때도 있다. 요즘 나도 모르게 발길이 가는 곳은 건강·생활서적 코너다. 예전엔 철학서나 자서전을 즐겨 읽었는데, 나이가 들어선지 그런 책에 눈길이 간다. 요리책을 보더라도 몸에 좋다는 메뉴에 먼저 눈이 간다. 지난겨울 독하게 감기에 걸린 뒤로 더 그렇다. 최근엔 일본서적인 『노화는 몸의 건조가 원인이었다』를 읽고 있다.

 집에 돌아와 마지막 의식처럼 반신욕을 빼놓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 20분쯤 지나 땀이 쭉 올라오면 ‘피가 돌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자신감까지 솟아난다. 내 경우엔 혈액 순환이 잘 되지 않아 몸이 차가워지면 마음까지 우울해지는 듯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힘들다 싶고 긍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땐 몸의 온도를 올리려 노력한다. 요즘엔 물에 생강을 갈아 넣는 방법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지난주부터 반신욕하며 보는 책은 요네하라 마리의 『속담 인류학』이다.

 반신욕을 끝내고 나와 다시 주스 한 잔. 어느새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할 시간이 된다. 다시 알람시계부터 ‘ON’으로 맞춰야 한다. 경쾌하게 ‘딸깍’.

최태지 1959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프랑스·미국 등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일본 가이타니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한 뒤 83년 객원 무용수로 국립발레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96년부터 2001년까지 6년간 국립발레단장·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면서 ‘해설이 있는 발레’ ‘찾아가는 발레’와 같은 대중 친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주요 출연작으로 ‘돈키호테’ ‘지젤’ ‘노트르담의 꼽추’ 등이 있다.

‘나의 아름다운 주말’ 속 그 곳

전홍조 아트필라테스 02 - 511 - 1127~ 8 www.artpilates.com 테이스팅룸(청담점) 02-512-2977 퀸즈파크 02-542-4074 토담골(청담점) 02-548-5115 새벽집 02-546-5739 파리크라상(한남점) 02-749-8757 기욤(GUILLAUME·한남점) 02-792-6701 www.maisonguillau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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