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정희 사퇴가 남긴 진보정치의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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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이정희 통합민주당 대표가 마침내 사퇴했다. 이 대표의 어제 사퇴 회견에서 “가장 낮고 힘든 자리에서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당연한 사퇴며 마땅한 자세다. 다만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사퇴하기까지 과정에서 이정희로 대표되는 진보정치세력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드러난 사태보다 바닥을 흐르는 사고방식의 문제가 컸다. 진보정치세력은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하는 과정에서 상식과 동떨어진 집단의식을 보여주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도덕성 마비다. 진보는 보수에 대해 늘 도덕성 면에서 앞서왔음을 자부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진보세력의 행태가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않음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그 인식이 도덕적으로 예민하지도 못함도 확인됐다.

 여론조사에 거짓 응답을 하라고 지시한 것은 분명 여론조작이다. 경선규칙을 어긴 불법적 행태다. “이 대표 본인이 지시하지 않았다”거나, “200명에게만 문자를 보냈다”는 핑계로 해명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사퇴할 정도의 사안이 아니라 다시 경선을 하면 된다’는 오판을 한 것도 사안의 심각성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이었다.

 이런 도덕불감증의 배경엔 진보정치세력의 독선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대의(大義)를 위해 희생하기에 작은 불법은 용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정치적 명분과 목표가 고귀하기에 수단에 하자(瑕疵)가 있어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는 시대착오적인 독선이다. 민주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곧 정해진 제도에 따른 합법적 절차와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자신들의 대의명분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 자유 역시 적법절차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

 진보정치는 이제 제도권 정치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총선은 진보정치의 위상이 달라지는 중요한 순간이다. 통합민주당은 정치적 위상에 걸맞은, 도덕적으로 성숙한 정당문화를 가꿔야 한다. 이번 사태의 교훈을 뼈에 새겨야 한다. 그래야 진보정치의 미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