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m 앞에서 출발했지만 정치에 공짜는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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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호 06면

1960년 1월 29일 김포공항. 이승만 당시 대통령에 맞서던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유석 조병옥 박사가 질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하려던 순간이었다. 조 박사는 환송차 나온 정일형 민주당 의원에게 갑자기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말을 꺼냈다. 당황한 정 의원이 “여기 목사님이 계신다”고 하자 조 박사는 환송객들에게 “병이 낫는 대로 돌아오리다”라며 비행기에 올랐다. 조 박사는 정일형의 연희전문학교 은사이자 정치적 동지였다.

4·11 총선 출마하는 2세 정치인들

4·11 총선을 앞두고 조 박사의 아들(자유선진당 조순형 의원)과 정 의원의 손자(민주통합당 정호준 후보)가 서울 중구에서 맞붙는다. 여기에 새누리당 후보인 정진석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뛰어들어 팽팽한 3파전을 벌이고 있다. 정진석 전 수석은 정석모 내무부 치안국장(훗날 내무부 장관 역임)의 아들이다. 미 군정청 경무국장으로 초대 치안총수를 지낸 조병옥 박사의 후배 뻘이니 얽히고설킨 인연이다. 정석모 전 장관은 민자당ㆍ자민련 의원 등을 역임하며 90년대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정일형 박사의 아들인 민주당 정대철 전 의원과 함께 활동했다.

4ㆍ11 총선에선 이렇게 눈에 띄는 2세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 유명 정치인들의 자녀들이다 보니 대중적 관심도 크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강남 벨트’의 송파을에 나서는 조세연구원장 출신의 유일호 의원은 고 유치송 민한당 총재의 아들이다. 잇따른 돌출 발언과 고소전으로 인지도를 한껏 높인 강용석 의원이 무소속 출마하는 마포을의 새누리당 주자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의 아들 김성동 의원이다. 부산 금정구의 김세연 새누리당 의원은 김진재 전 의원이 선친이다. 지난 18대 때 지역구를 물려받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최연소(36세) 당선자가 됐다. 같은 당 유승민(대구 동을) 의원 역시 유수호 전 의원의 차남이다. 수원병(팔달)에서 5선에 도전하는 남경필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12일 선친인 고 남평우 의원의 기일을 앞두고 페이스북에 “지금도 지역 주민들께서 아버님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충북 정치 1번지인 청주 상당에선 홍재형 국회부의장(민주통합당) 대 정우택 전 충북지사(새누리당)의 맞대결로 최대 격전지가 됐다. 정 전 지사의 선친은 5선의 정운갑 전 농림부 장관이다.

민주통합당에선 노승환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 노웅래 전 의원이 마포갑에서 국회 재입성을 시도한다. 한국 정치사의 마당발 김상현 전 의원의 아들 김영호 전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도 서대문을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확정됐다. 그에겐 18일 확정되는 통합진보당과의 야권후보 단일화 여론조사가 마지막 관문이다. 여수갑의 김성곤 의원 역시 선친이 김상영 전 의원이다. 당적 바꾸기 논란을 빚은 이용희 의원의 충북 보은-옥천-영동 지역구를 물려받은 이재한 민주통합당 후보는 당에서 일찌감치 단수 공천을 받았다. 이곳에선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동생인 박근령씨가 지난 16일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가 17일 “충청도에서 형제간 우애를 상처 내게 할 수 없다”고 밝혀 공천 여부는 미지수다.

조금만 소홀해도 선친 함자 나와
2대, 3대를 잇는 총선 출마엔 명과 암이 공존한다. 부친의 조직ㆍ인맥ㆍ명성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은 데다 젊은 시절부터 정치를 접하며 선행학습을 한 만큼 시작은 평범한 정치 지망생들보다 유리하다. 하지만 ‘세습’이라는 경쟁자들의 반발과 여론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2세 정치인들의 증가는 정치 엘리트 충원 과정의 폭을 좁히는 것이라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때로는 부친의 정치적 공과가 정적들의 공격에 활용된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에 대해 “유신 체제를 사과하라”고 나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공격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남경필 의원은 “정치를 시작하며 남들보다 50m 앞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한다. “큰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잘 하면 부친의 업적이고 잘못하면 아들의 무능이 되니 항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김세연 의원 역시 “솔직히 내 어깨를 항상 선친의 무게가 누르고 있다”며 “조금만 소홀하면 곧바로 주변에서 선친 함자가 튀어 나온다”고 말했다. 조순형 의원은 “1981년 처음 등원한 후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엔 항상 ‘선친의 이름을 욕되게 해선 안 된다’는 걱정이 잠재 의식처럼 각인돼 왔다”고 밝혔다. 이번이 ‘선거 3수생’인 정호준 후보는 “2004년 첫 출마를 준비할 때 지역 당원의 70%가 반대했을 정도로 반발이 컸다”며 “8년간 각고의 노력을 들이고서야 당원과 지역구민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일본선 정치 가문 전통
2세 정치인에 대해 미국과 일본에선 당연시하는 풍토다. ‘2세 정치인’을 넘어 ‘정치 명문가’와 ‘2세 총리’가 잇따른다. 미국에선 케네디 가문이 대표적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3대에 걸쳐 상원의원 3명, 하원의원 4명, 각료 1명을 배출했다. 케네디가 의원들의 의회 등원 기간을 합치면 93년이다. 부자(父子)가 대통령을 역임한 부시 가문도 빼놓을 수 없다. 록펠러 가문에선 넬슨 록펠러 부통령을 비롯해 주지사 3명, 상원의원 2명, 하원의원 2명이 나왔다. 일본도 만만치 않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의 외손자다. 아베의 후임 총리인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총리의 부친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다.

이준한 인천대(정치학) 교수는 “미·일의 경우 정치 역사가 우리보다 오래된 데다 일본에선 가업을 잇는 풍토가 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에선 당사자의 능력을 존중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그래선지 한국보다는 2세, 3세 정치인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기관인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미국에선 지역구민의 하향식 공천을 통해 2세, 3세 정치인이 등장하기 때문에 ‘세습 정치’에 대한 비판이 우리보다 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계에선 ‘선친의 음덕’이라는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2세 정치인의 ‘능력 입증’이 필수적이다. 정진석 새누리당 후보는 “선대로부터 정치를 배운 경험은 분명히 도움을 주는 요소이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정치적 자산”이라며 “단순하게 선대의 후광에만 기대선 유권자들로부터 절대 인정받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정문헌 새누리당 후보도 “유권자들은 끊임없이 부친과 저를 비교하는데 부친의 이름을 뗀 상태에서도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 선택 받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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