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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온 케네디家 며느리 "시댁 사람들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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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케네디가(家)의 며느리 캐서린 앤 케네디(53·사진)가 방한했다. 캐서린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막내동생으로 상원의원을 지낸 에드워드 M 케네디의 며느리다. 미국에서는 ‘키키(Kiki) 케네디’라는 애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뉴욕 타임스는 1993년 10월 11일자 기사에서 그와 에드워드 M 케네디 주니어의 결혼을 전하면서 신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캐서린 앤 거슈윈은 예일대 의대 정신과 조교수이자 전문의다. 브라운대 최우등 졸업(summa cum laude) 후 코네티컷대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올해 열여덟인 키키의 딸 카일리 엘리자베스 케네디는 가장 친한 친구가 한국인이다. 그래서 한국이 궁금해 찾아왔단다. 케네디 가문 모녀는 1주일간 한국에 머물며 비무장지대(DMZ)·경주를 돌아보며 한국의 맛과 멋을 흠뻑 즐겼다.

지난 5일 서울 신촌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그녀를 인터뷰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처럼 우아한 진주목걸이에 정장 차림을 기대했는데 청바지에 보라색 상의를 받쳐 입고 겸손하게 웃는 소박한 여성이 나왔다. 그는 외가 쪽 숙모가 1960년대 중반 이대에서 영어를 가르친 인연을 전하며 “활기차고 똑똑해 보이는 한국 여성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생기는 듯하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남편을 어떻게 만났나.
“다들 그걸 궁금해 한다(웃음). 1990년, 예일대에서 친한 교수님이 연 파티에서 우연히 만났다. 교수님 댁에서 치즈를 곁들여 셰리주를 가볍게 마시는 자리였다. 피곤해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교수님 얼굴을 봐서 참석했다. 알고 보니 교수님이 테드(남편의 애칭)의 고모와 친한 사이였고, 함께 파티에 와 있더라. 자연스레 소개를 받았다. 테드도 마침 예일대에서 환경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첫눈에 반했나.
“불꽃이 튀는 것처럼 짜릿했다.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가 너무 잘 통했다. 내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끝까지 안 물어보더라. 작별인사를 하면서도 악수만 청하고. 실망했지(웃음).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생각하며 잊어버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사흘 후, 테드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예일대 안내에 전화를 걸어 물어물어 번호를 알아낸 거다. 바로 데이트 약속을 잡았고, 3년간 연애했다.”

-왜 3년인가.
“속속들이 알고 난 후 결혼하고 싶었고, 내 일을 존중하는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다. 1993년 2월 약혼한 후 10월 1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다.
“부정은 못하겠다(웃음). 테드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건 큰 행운이다.”

-결혼식은.
“뉴헤이븐 블록 아일랜드 성당에서 식을 올렸고, 350명의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서 전야 파티를 열었다. 어색함을 없애려고 가장무도회식의 파티를 열었다. 해적이나 어부로 분장해 다들 마음껏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케네디가의 일원이 되는 건 부담도 클 듯한데.
“‘케네디’라는 이름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시댁 식구들 모두가 따뜻이 맞아줬다. 제3자에게 날 소개할 때도 ‘테드의 부인’이라고 하지 않고 ‘내 사촌동생’이라고 친근하게 얘기해 준다. 친절한 배려 덕에 막상 시댁 식구들 사이에 있으면 ‘케네디’라는 이름은 잊어버리게 된다. 여름휴가를 시댁 식구들이 함께 보내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기다려진다.”

-가까이에서 본 케네디가 사람들은 어떤가.
“똑똑하고 재치가 넘치면서도 굉장히 현실적이다. 정치 명문가답게 화술도 뛰어난 데다 자기 일에 열정이 넘쳐 대화하면 즐겁다. 건방진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케네디가의 며느리라면 항상 사람들은 재키 오(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같은 스타일을 떠올리지만 사실 케네디가 사람들은 외모나 스타일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뭘 입는지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더 중시한다. 남과 나누는 걸 중시하는 게 가풍이다.”

-본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왜 정신과 의사가 됐나.
“어렸을 때 우리 집은 행복했지만 금전적으로 풍족하진 못했다. 난 남자에게 기대지 않는 독립적 여성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의사가 되겠다고 일찌감치 결심했다. 경제가 아무리 어려워져도 사람들은 병원에 가니까(웃음). 정신과를 택한 건 친구들이 여러 가지 일을 나에게 상담해 오고, 친구들을 돕는 데서 보람을 찾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브라운대를 졸업하고 2년간 교사를 하면서 등록금을 벌어 코네티컷대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했다. 과를 잘못 택한 게 아닐까 두려웠었지만 첫 환자를 본 후 그런 생각은 씻은 듯 사라졌다.”

-예일대에서 조교수를 하면서 진료하는 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환경운동까지 관여했다.
“그래서 집이 아주 엉망이다(웃음). 집안일을 잘할 시간을 못 만들겠다. 하지만 남편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용기를 잃지 말라’고 격려해 줬고, 아들·딸도 집회에 함께 나와줬다. 자발적으로(웃음).”

-‘가스관 공사를 중단하라(Stop the Pipeline)’라는 환경보호 프로젝트의 대변인까지 지냈는데.
“감회가 새롭다. 10년에 걸친 과정이었고, 결국 법원이 우리의 손을 들어줬다. 코네티컷에 45마일(약 72㎞)에 달하는 가스관을 설치하겠다는 모 회사의 사업에 반기를 들었던 프로젝트다. 난 원래 환경운동가는 아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코네티컷의 희귀 동식물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듣고는 적극 나섰다. 코네티컷 주 정부와 손을 잡고 벌인 환경운동이었다. 사실에 기초한 합리적 주장을 펼쳐 소송에서 승리했다. 투쟁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가 사는 터전의 환경을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시아버지 고(故)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공화당 소속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학교교육 강화 프로젝트(No Child Left Behind) 법안을 적극 지지하는 등 초당파로 유명했는데.
“시아버지는 합리적이고 국익과 공익에 도움이 된다면 좌우 당파를 가리지 않았다. 그 점을 깊이 존경했다. 요즘 미국 의회에선 사라지고 있는 모습인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 정치에 대해선 관심이 있나.
“신문을 아침마다 읽는데, 한국의 (영어)신문을 오늘 아침에 보니 공천 관련 잡음이 있다고 나와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한국 정치도 이슈들은 있는 것 같다.”

-최근 케네디가의 정치 명맥이 약화됐다는 평인데, 14살 아들 꿈이 정치인이라고 들었다.
“시아버지 장례식 당시 아들이 11살이었다. 아들이 ‘저도 할아버지처럼 훌륭한 정치인이 되겠습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했다는 걸 신문을 보고 알았다(웃음). 지금은 먼저 변호사가 된 후 정치에 입문하겠다고 한다.”

-한국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절대 포기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남자들에겐?
“집 안팎에서 부인과 동등하게 일하는 남자가 진짜 남자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현대적 남성이 된다는 게 남성성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니까.”

-더 원하는 게 있나.
“글을 더 잘 쓰고 싶다. 칼럼니스트가 꿈이다. 미국 신문엔 기고도 몇 번 했는데, 아직 실력이 모자란다. 중앙SUNDAY에서 내 칼럼을 받아줄 정도로 글을 잘 쓰면 좋겠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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