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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대통령 전관예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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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전직 대통령에게 전관예우라는 게 있다면 어떻게 될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 올라갈 일은 없지 않았을까.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유배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국회에 불려 나와 정치신인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패대기친 명패 소리에 놀라는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전관예우를 어느 정도 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긴 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부정축재한 비자금을 개인 재산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서비리나 대북 송금문제, 3대 게이트, 임기 말마다 불거진 아들 문제, 친인척 문제까지 덮고 넘어가자면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게다. 이런 것마저 불문(不問)에 부친다면 임기 중 마음 놓고 챙기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보는 건 ‘1987년 체제’인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시작된 이후 임기 4년차 고비를 편하게 넘어온 대통령을 보지 못한 탓이다. 하나같이 친인척 비리에 망신을 당하고, 사과에 사과를 반복하고, 정치권에 난타 당하다 급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식물 대통령’이 되는 게 정해진 코스가 돼버렸다. 정권이 여당으로 바뀌건 야당으로 넘어가건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유폐(幽閉)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수의(囚衣)를 입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들 사면·복권에 목을 맸다.

 심지어 전임자를 공격하는 것이 선거 전략의 단골메뉴가 됐다. 노태우 후보가 6·29선언을 할 때만 해도 전두환 대통령이 당선을 돕기 위해 짠 각본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이후론 실제로 대통령이 임기 중 심각한 갈등을 빚고, 힘이 ‘미래권력’의 수중에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 차기 여당 대통령 후보 행사장에서 인형이 몽둥이를 맞고 화형식을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대통령 임기가 사실상 줄어든 셈이다. 그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탄핵소추됐고,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촛불시위가 벌어져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 노래를 들었다는 말로 동정을 구해야 했다.

 대통령 임기의 뒷부분만 잘라먹는 게 아니다. 전임자와 갈등을 빚으며 임기를 시작하면 국정상황 파악부터 지체된다. 보통 사람이 자리를 옮길 때도 잘 넘겨받으면 일 배우는 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고약한 전임자를 만나 맨땅에서 시작하려면 한동안 고생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 한 청와대 참모는 “청와대가 텅텅 비었다. 이럴 수가 있느냐”고 화를 냈었다. 문서가 모두 없어졌다는 것이다. 어떤 문서는 정부 문서 보관소에 밀봉해 넣고, 어떤 문서는 다음 정부에 넘겨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후임자가 전임자의 기록에서 약점을 찾아내 공격할 소재로 삼는 분위기에서는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렇게 빼앗듯이 문서를 확보해봐야 별 도움도 안 된다. 문서 뒤에 감춰진 미묘한 느낌을 전수받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외교나 대북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호의적인 바통 넘기기가 절실한 이유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가끔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의견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한꺼번에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하는 얘기가 별로 유용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마 그 이후론 그런 모습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도했던 상왕(上王)식 ‘국가원로자문회의’는 맞지 않다. 그러나 5년마다 철저히 단절되고, 심지어 이전 정부 것이라면 무조건 뒤집어 버리는 행태가 반복되는 건 국가적 낭비다.

 레임덕은 대통령 자신의 책임이다. 주변 사람이 비리를 저지르고 정책을 잘못 추진해도 결국은 그 사람을 쓴 대통령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5년마다 반복되는 이런 현상을 대통령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급격한 권력 이탈 현상은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한에 대한 반작용이다. 계곡이 깊은 건 산이 높기 때문이다. 임기 말 비리사건이 한꺼번에 터지는 건 힘 있을 때 감춰져 드러나지 않아서다.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해도 대통령 자리가 없으면 발목 잡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그러니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그 다음 선거를 겨냥한다.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FTA 불가피론’을 외쳤던 사람들이 야당이 된 뒤 안면을 바꾸고 ‘FTA 반대’에 모든 것을 거는 식이다. 결국 87년 체제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그러한 논의는 대통령 선거에 묶지 않고는 또다시 논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올해도 표를 좇는 데 바빠 시기를 놓쳐버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