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마이 라이프] 51년 만에 다시 입은 교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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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여고 1학년 4반 학생인 윤기숙(왼쪽 둘째)씨가 손녀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올해 69세인 윤씨는 51년 만에 복학했다. [프리랜서 오종찬]

“꿈이 있는 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제가 바로 그 증거지요.”

 17일 전북 전주시 인후동 전주여고 1학년 4반 교실. 보충수업을 받고 있는 생기발랄한 소녀들 사이에 선 ‘여고생’ 윤기숙(69)씨는 “내년이면 고희(古稀, 70세)가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라고 말했다. 그림 전시회(10~16일)를 마치고 오랫만에 등교한 윤씨를 본 손녀뻘 학생들은 “언니야, 반갑다”며 즐겁게 하이 파이브를 했다.

 윤씨는 지난해 3월 복학했다. 교복을 벗은 지 51년 만이었다. 그는 1960년 전주여고에 입학했지만, 1학년을 채 못 마치고 중도하차 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전주여고는 내 고향 진안군에서 일년에 두, 세명 들어가는 명문이었죠.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학교인데, 체육시간에 갑자기 쓰러졌어요. 심장병이었죠. 결국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그렇게 못다 피운 학창시절의 꿈이 가슴에 앙금처럼 남았죠.”

  직장생활을 거쳐 23세에 남편(최석조·73)을 만나 결혼하고 1남 3녀를 키우는 동안 학업에의 꿈은 멀어져 갔다. 이웃의 권유로 40세에 보험업에 발을 들여놨다. 모집인으로 시작했지만 뛰어난 영업실적을 보여 3년 만에 소장으로 승진, 13년 간 관리자로 근무했다. 55세 정년퇴임 후엔 부녀회,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사회복지시설의 어르신들 이발을 해 드리기 위해 미용사 자격증까지 땄다.

 “가정, 직장 생활 등 남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그러나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볼 때마다 맘이 아렸죠. 꿈에도 교문이 닫혀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정도 였어요.” 윤씨는 오랜 망설임 끝에 지난해 모교의 문을 두드렸다. 학교 측은 난색을 표했다. 윤씨는 “15년 간 직장을 다니면서 결근한 적 없다. 학교도 개근상 탈 자신이 있다”며 승낙을 얻어냈다.

 할머니뻘 나이임에도 윤씨는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늘 수업시작 1시간 전쯤 등교해 체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예습도 한다. 오후 4시까지 정규수업도 모두 듣는다. 에어로빅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제주도 수학여행도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영어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시험 땐 수학교사 출신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가며 새벽 1시까지 공부를 하곤 한다.

 학생들은 그를 ‘할머니’로 부르려 했다. 윤씨는 “동등한 입장에서 공부를 하러 왔으니, ‘언니’로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같은반 박혜원(17)양은 “ 항상 열심히 사는 윤 언니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곤 한다”고 말했다.

 윤씨의 꿈은 화가다. 직장을 나온 뒤 15년간 문화센터 등에서 배운 문인화·서예는 20여 회 입선할 정도로 솜씨를 인정 받는다. 고교 졸업 후엔 미대에 진학, 공부를 더한 뒤 후학양성에도 나설 계획이다.

 “ 늦었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꿈과 열정이랍니다.” 윤씨가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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