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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5년 크레바스’ 뛰어넘어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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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호 01면

“퇴직과 은퇴, 느닷없이 닥친다. 닥쳐 보면 생각하곤 영 딴판이다. 막상 무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한 해 수십만 명 쏟아지는 퇴직·은퇴자들의 탄식이다. 전문가들은 100세 고령화 시대 ‘장수의 저주’를 경고하고, 후반기 인생을 앞둔 중장년층도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죄는 것 같은데, 일이 닥치면 이렇게 허둥지둥할 수가 없다. 서울 둔촌동에서 태권도장을 25년간 운영하다 건강문제로 7년 전 접은 이모(61)씨는 요즘 부인이 하루 3만원 받는 식당 도우미로 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도 태권도장 할 때는 한 달 수입이 400만원 정도 됐는데 지금은 국민연금 30만원이 고작”이라고 했다. 건강 강사와 아파트 경비 일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4억원 시세의 38평형(125㎡) 아파트를 팔아 전세로 살다가 근래 25평(82㎡)짜리 사글세로 나앉았다.

쏟아져 나오는 베이비부머 퇴직자

중견 건설사에서 30년 넘게 일하다 중역으로 퇴직한 김영모(62·가명)씨도 실패의 연속이다. 2년 전 경기도 분당에 165㎡ 규모의 고기구이집을 차렸지만 1년 만에 인테리어비 등으로 2억원이나 까먹고 가게 문을 닫았다. 퇴직금 2억5000만원에 아파트 담보대출로 1억3000만원을 보태 모두 3억8000만원이 들어간 창업이었다. “유동인구가 듣던 것보다 훨씬 적고, 식재료·조리 공부가 덜 돼 재료비 낭비가 심했다”고 후회했다. 지금은 종업원 없이 부인과 둘이 할 만한 작은 분식집을 알아보고 있다.

이들 은퇴 선배 말고도 요즘 퇴직을 앞둔 베이비부머들의 환경은 더욱 나빠질 것 같다. 서울 소재 한 대기업의 박유현(51·가명) 부장. 사는 아파트를 포함해 총 재산은 6억원 정도고 월급은 700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월 200만원 넘는 두 자녀(중3·고2) 사교육비, 팔순의 부모 생활비, 아파트 대출 이자 등으로 살림이 빠듯하다. “정년이 멀지 않았지만 외벌이에 저축도 적고 회사 일은 바빠 은퇴 준비는 남 이야기 같다”고 털어놨다.

은퇴 계층의 인생 후반기 생존 경쟁이 부쩍 더 치열해졌다. 인구의 15%, 가구주의 23%에 달하는 710여만 명의 베이비부머(1955~63년생)가 지난해부터 한 해 약 80만 명씩 55세를 맞기 시작한 때문이다. 50대 중반에 재취업이 잘 될 리 없고, 섣부른 생계형 점포 창업에 어렵사리 모은 쌈짓돈을 고스란히 갖다 바치기 일쑤다. 귀가 얇아 기획부동산이나 금융브로커 등에 속아 퇴직금 날리고 뒷방에 나앉는 가장들도 많다. 은퇴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은 건강을 앗아가고, 생활고로 인한 가정불화는 황혼이혼의 주범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다른 연령대와 달리 50대 이상 이혼은 2006년 이후 증가 일로다. 이에 따라 2010년 55세 이상 남성의 이혼 건수는 1만7400건에 달했다. 여윳돈 굴리기도 쉽지 않다. 저금리·고물가에 부동산 값은 떨어져 은퇴 후 생활 여건은 악화 일로다.

연구기관이나 전문가들은 3억원 정도 현금을 쥔 계층이라도 은퇴 후 5년 안에 5명 중 2명 정도는 실패의 ‘크레바스’를 넘지 못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일례로 산업은행은 최근 ‘고령화와 은퇴자산의 적정성’ 보고서에서 베이비부머의 은퇴 파산 가능성이 40% 이상이라고 경고했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개인 워크아웃(채무조정)을 신청한 신용불량자 가운데 50세 이상이 1만8324명으로 신청자 넷 중 한 명꼴이었다. 이 신청을 처음 받은 2002년(10명 중 한 명꼴)에 비해 50대 은퇴 계층이 훨씬 취약해졌다. 위원회의 황재호 팀장은 “음식점·편의점 등을 창업했다가 실패한 영세 자영업자가 많아진 때문”이라고 전했다. 중소기업청 통계를 봐도 종업원 5인 미만 영세 소상공업체의 5년 생존율은 38%에 불과했다.

삼성증권의 김진영 은퇴설계연구소장은 “이달 실시한 자체 설문조사와 각종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현금 여력이 좀 있는 계층조차 30~40%가 은퇴 후 5년 안에 경제적·가정적으로 파탄을 경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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