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조 선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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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호 38면

야간자습 시간이었다. 답답한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던 내게 그가 슬그머니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건넨 것이. 당시 삼중당 문고판 그 책의 제목은 『차륜 밑에서』였다. 1970년대 말~80년대 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성적은 신분이고 권력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개 위풍당당했고, 성적이 나쁜 아이들을 은근히 무시했다. 나 같은 꼴찌는 죄인이고 불가촉천민이다. 무슨 몹쓸 전염병이라도 걸린 사람 취급을 하며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슬금슬금 피했다. 그럴 때면 학교 앞 도로에라도 뛰어들어 버스 차 바퀴 밑에 깔리고 싶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정말 그랬을지 모른다. 그는 성적만큼이나 성격도 훌륭해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도 곧잘 어울렸고, 항상 진심으로 대했다. 그가 준 삼중당 문고판은 손바닥만 한 크기여서 교복 앞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나는 다 읽고도 한동안 그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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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일요일이었는데 어디 놀러갔다가 그만 차비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집이 근처라는 게 생각나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는 알겠다며 곧 나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별수 없이 걸어서 집으로 가야 하나 생각할 때쯤 그가 그의 형과 함께 나타났다. 그때 나는 알 것 같았다. 아마 내 전화를 받고 그의 집에서는 한바탕 가족회의가 열렸으리라. 그의 가족은 내가 친구를 괴롭혀 돈을 뜯어내는 나쁜 학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가지 못하게 그를 막았을 것이다. 그가 아니라고 말해도, 그럴수록 가족의 걱정은 더 심해졌으리라. 마침내 형과 함께 내보내는 것으로 타협했을 것이다. 그가 건네준 차비를 받으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나는 집으로 오는 버스 차륜 위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말수도 적은 그가 나를 변호하며 가족을 설득했을 광경을 상상하니.

그 후 나는 그의 집에 여러 번 놀러갔고, 그의 가족도 내가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그렇게 나쁜 학생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반갑게 맞아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는 재수를 했지만 우리는 고등학교 때보다 더 친해졌다. 좀 더 세월이 지나 각자 세상으로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나지 못할 때는 편지를 주고받았고, 만나면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는 그에게 받은 편지들이 지금도 책상 서랍 속 상자에 들어 있다. 그는 내가 시를 쓰길 바랐지만 내가 쓰는 글이면 시가 아니라도 응원해 주었다. 우리는 인연이 깊어 나는 그의 결혼 때 함을 들었고, 내 결혼 때 주례를 맡아주신 분이 그의 아버지였다.

그런데도 요즘은 자주 못 만난다. 나는 어쩐지 그가 바쁜 것 같고 안 그런 줄 알면서도 괜히 만나자고 하는 게 폐를 끼치는 것 같다. 관계의 침묵에도 수레바퀴처럼 관성이 있다. 그렇게 연락을 못하다 보면 그게 미안해서 또 연락을 못 한다. 다행히 이번에 낸 책을 보냈더니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책 잘 받았다. 항상 잊지 않고 보내주니 고맙구나. 잘 읽을게. 열.”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잊을 리가 없잖아.”
오늘은 오랜만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꺼내 읽어야겠다.


김상득씨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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