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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하청업체 53%의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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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한애란
경제부문 기자

공정거래위원회는 1999년부터 해마다 전국 수만 개 하청업체에 우편으로 설문지를 돌린다. ‘의사에 반해 원사업자로부터 자재를 구입한 경우가 있습니까?’ ‘정당한 사유 없이 경제적 이익 제공을 요청받은 적 있습니까?’ 등의 질문이 담긴다. 물론 ‘절대 비밀’을 보장한다. 원청업체의 부당한 요구에 시달려온 하청업체라면 조용히 이를 신고할 기회다.

 공정위가 지난해 조사한 설문결과를 15일 공개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 못지않게 눈에 띈 게 응답 회수율이었다. 설문지를 받은 5만7000개 하청업체 중 답을 준 곳은 47%에 그쳤다. 회수율은 최근 3년 동안 해마다 떨어졌다. 나머지 53%는 왜 입을 다물어버린 것일까.

 지난해 조사에 응했던 중견제조업체 A사에선 작은 소동이 있었다. 담당자가 너무 솔직히 답한 게 문제였다. ‘원청업체가 지연이자를 주지 않는다’고 써냈다. 이를 뒤늦게 안 A사 임원은 ‘문제 없음’으로 답변을 고치느라 진땀을 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장은 공정위가 시정조치를 하겠죠. 그런데 조사내용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 다음해 계약은? 바로 끝이에요.”

 중견건설업체 전 사장 B씨도 같은 얘기를 한다. “아무리 미워도 ‘큰집’이 평안해야 ‘작은집’도 무탈하죠. 하청업체가 공정위 조사에 응하기란 쉽지 않아요.” 하청업체 대부분이 원청업체 한 곳에 매출의 60%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많은 하청업체가 그저 침묵할 뿐이다.

 하도급 실태조사는 원래 원청업체를 압박해 불공정거래를 예방하는 게 목적이다. ‘당신네 하청업체 전부 조사하니까, 조심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보복이 두려운 하청업체들이 답변을 피하거나 좋게 꾸며 답한다면, 이런 기능은 사라지고 한낱 ‘여론조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공정위는 하청업체의 침묵을 깨는 방법을 고심 중이다. 하청업체와 ‘핫라인’을 구축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신고방식보다 중요한 건 ‘공정위가 불공정한 기업 생태계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정위가 쓸 수 있는 수단도 늘었다. 지난해 6월 하도급법 개정으로 생긴 기술탈취 기업에 대한 징벌적 세 배 배상 조항도 그중 하나다. 공정위가 언제쯤 그 힘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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