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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해야 안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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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논설실장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얼굴은 초췌했다. 1993년 아직 제대로 이름마저 붙이지 못한 동교동 아태재단 사무실. 세 번째로 도전한 대통령선거에 실패한 그가 영국으로 떠났다 6개월 만에 돌아온 직후다. 간단하게 안부를 묻고는 곧바로 정계 복귀로 화제를 돌렸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지만 직업적 의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 관한 기사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한사코 캐물어야 하는 게 기자다. DJ는 귀국한 그해 연말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란 자서전을 출간했다. 그동안 나온 자서전 가운데 가장 가볍고, 쉽고, 친근한 이미지로 포장된 책이었다. ‘새로운 시작’이 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런데도 그의 정계 복귀 여부는 영국에서 돌아온 이후 만 2년이 지나도록 뉴스거리였다.

 안철수 원장의 정치적 행보도 매우 조심스럽다. 6일 ‘안철수재단’(가칭) 설립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정치와 관련된 질문은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정치와 관련해 물어도 웃기만 했다. 사실 안 원장의 판단이 옳은지도 모른다. 법륜 스님의 말처럼 “기존 정치 리더십에서는 정치를 하지 못할 사람”이라서 기존 정치구도에 뛰어들면 바로 무너질지도 모른다.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보인 안 원장의 폭발적 인기, 최소한의 발언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지지도…. 무엇이 아쉬워 미리 나서겠는가.

 그러니 ‘커밍아웃’을 요구하는 것은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려는 속셈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문제는 안 원장의 행보가 너무 정치공학적으로 비친다는 점이다. 이미지 홍보만 하고, 정치적 입장 표명은 회피하며, 흠집 날 틈을 주지 않고 선거를 치르겠다는 의도로 보일 수 있다. 안 원장의 침묵은 이미 정치적 입장이 알려진 DJ의 경우와는 다르다.

 안 원장과 가까운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안 원장이 ‘깃발’이 돼 주면 자신은 ‘깃대’가 돼 깃발이 나부낄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오가 정치적 신뢰를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집권은 한두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정치세력이 하는 것이다. 안 원장이 아무 정치세력에나 업혀 배우 같은 역할만 할 게 아니라면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사람도 모인다. 정치적 견해를 떠나 당선 가능성만 좇아 날아드는 무리와 같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안 원장이 ‘고민’하는 사이 정치지형이 변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지지도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 6일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0.5%포인트 차로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앞질렀다. 일부 조사에서는 문 고문이 안 원장까지 앞지르는 것으로 나온다. 모금도 ‘대박’이 났다고 한다. “안 원장 없이도 민주통합당이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안 원장이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페이스메이커’가 돼 달라는 주문도 있고, 안 원장을 여권 후보 중 한 사람으로 놓고 박 위원장과 경쟁하거나 손을 잡는 구도를 예측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법륜 스님이 우려하는 것도 이런 가능성일 것이다. 모두 안 원장의 소극적인 정치행보가 빚어낸 일이다.

 안 원장이 바둑을 배운 얘기는 독특하다. 의대 예과 2학년 시절 바둑서적 50권 정도를 외울 만큼 읽은 뒤에야 실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기초를 튼튼히 한 덕분에 1년 만에 아마추어 1, 2단 수준에 올랐다고 한다.

 정치도 그런 수순을 밟고 있는 듯하다. 전문가들을 불러 과외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는 바둑과 다르다. 기업 경영과도 다르다. 정치는 함께하는 집단이 있어야 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최고경영자(CEO)로서 뛰어난 전문성을 갖춘 이명박 대통령이 ‘불통(不通) 대통령’이라고 비난받는 이유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법륜 스님은 안 원장을 “사람들이 원하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연 내가 이걸 행복하게 잘할 수 있느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더 관심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점이 안철수의 매력이다. 그런데 정치에서 ‘무엇’을 하는 것은 책 50권을 읽은 뒤에나 가능한 게 아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처럼 중요한 국정현안에 의견을 밝히면서 부딪치는 과정이 정치다. FTA처럼 중요한 사안에도 함구하는 것은, 흙 묻히지 않고 농사지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부딪치면서 검증받고 사람을 모으는 것이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