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본주의 ‘자기조절성’ 도전받아… 산업화 산물인 국가 역할 다시 디자인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6호 10면

‘한국사회 대논쟁’ 참석자들이 토론에 앞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손호철(서강대)·문휘창(서울대) 교수, 김종혁 국장, 최배근(건국대)·정용덕(서울대)· 한준(연세대) 교수. 토론은 2일 오후 중앙일보에서 이뤄졌다. 조용철 기자

정용덕(서울대) 교수=자본주의 논쟁은 거대담론이긴 하지만 사회과학자들에겐 가장 중요한 주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진행돼 왔는지 세계적 맥락과 한국적 상황을 짚어봤으면 좋겠다. 왜 이 시점에서 자본주의가 무력화되고 있는지, 자본주의의 생존을 따지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뭔지를 논의하자. 대안과 발전 방향도 논의했으면 한다.

연중 기획 한국사회 대논쟁 ② 자본주의의 미래

김종혁 편집국장=2008년 금융위기 때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가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제목이 ‘자본주의의 미래’였다. 요즘 FT의 특집기사 제목은 ‘자본주의의 위기’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논란이 진행 중이다. 미국과 유럽의 경제 침체에 이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Street)’ 같은 분노의 외침도 이어진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자본주의의 본질적 결함 때문인지,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건지 따져보자.

최배근(건국대) 교수=이미 1970년대부터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 위기 국면에 들어갔다. 영국 산업화를 중심으로 본다면 1700년대부터 약 2세기 간 자본주의는 시스템적으로는 순기능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황금기라고 할 정도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지난 2세기 동안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상호 보완적 역할을 했다. 시장과 자본의 독주에 대항해 노동운동과 민주주의가 사회공동체를 지키려는 힘으로 작동했다. 자본주의는 각 나라의 역사적 유산과 특성을 상당히 반영해 왔다. 영·미의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 북유럽 자본주의, 일본의 네트워크형 자본주의가 있고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도 있다. 자본주의에 대해 진보와 보수는 몇 가지 측면에서 타협했다. 성장의 결과가 대다수에게 혜택이 되고, 교육과 기회는 차별 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선 낙오자가 생기는데 이것을 사회가 떠안는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게 2차대전 이후 이뤄진 최소한의 합의였다. 80년대부터는 이런 게 깨졌다. 시민공동체가 위협받는 상황이 시작됐다. 7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순기능이 소진됐는데 이는 산업화가 종료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미국은 68년 ‘산업화의 종료’를 선언했다. 자본의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출구로 찾은 것이 금융 부문이다. 새로운 산업구조로의 전환에 실패하고 탈제조업화하면서 금융으로 이행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손호철(서강대) 교수=90년대 소련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란 말 자체가 불온시됐었다. 하지만 이 토론이 보여주듯 한국 주류사회가 자본주의란 말을 공공연하게 거론하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의 위기를 반영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역사적 산물이다. 크게 보면 3단계다. 20~30년대 이전은 테일러주의와 야경국가를 기반으로 한 ‘야만의 자본주의’였다. 자본과 노동 자체가 첨예하게 대립한 철저한 반(反)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 기본은 보통선거권인데 모든 자본주의자가 여기에 반대했다. 그 당시엔 ‘보통선거권=사회주의’라고까지 생각했다. 보통선거에 반대한 남성 유산자(有産者)만의 민주주의가 1기라면, 2기는 ‘포드주의’라고 불렀던 황금기다. 노동과 자본이 생산성과 임금의 빅딜을 통해 상생적 관계로 전환했던 시기다. 거기에다 밑으로부터의 압력, 즉 노동자의 요구가 수용되면서 팽창성과 탄력성이 더해진 황금기다. 80년대 이후 위기가 찾아온다.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노동과 자본이 대립했고 1대99, 2대8의 사회로 변해버렸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간 내재했던 긴장도 다시 나타났다. 주목할 것은 자본주의 위기가 노동의 저항과 같은 외부 영향 때문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내부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문휘창(서울대) 교수=한국은 그동안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빠르게 성장해 왔다. 지난 50년간 1인당 소득이 101달러에서 2만 달러로 늘었다. 약 200배인데 세계 기록일 것이다. 엘리트가 정책을 선택적으로 결정해 움직이는 시스템으로 급성장했으니 부작용도 있었다. 짧은 기간에 부가 팽창되면서 빈부 격차가 벌어졌다. 그런 격차감이 심리적으로는 더욱 심화됐다. 경제 발전이 애초부터 소수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대다수는 소외감과 억울함을 느끼게 되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로 갈 수는 없다. 유럽형과 미국형 발전 방식을 선택적으로 잘 받아들여야 한다. 자본주의가 정글이라는데, 자본주의의 핵심은 가치 창출이다. 따라서 윈-윈(win-win)이다. 전쟁과 스포츠, 도박은 한 사람이 위너(winner)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루저(loser)가 된다. 자본주의에서 윈-윈이 되려면 리소스(resources)가 최적화돼야 하고 그걸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 윈-윈 철학과 가치 창출 기능을 잘 이용하지 못해 리먼브러더스 같은 문제가 생겼다. 자본주의의 본질이 아니라 운영의 문제일 뿐이다.

한준(연세대) 교수=대체 어디까지를 자본주의로 볼 것인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자본주의는 여러 형태를 겪어 왔다. 대공황 때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내놨는데 사회주의보다 더한 세금을 매기기도 했다. 어쩌면 사회주의나 마찬가지인데, 지금은 뉴딜정책을 자본주의로 분류한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자본가가 원 없이 돈을 벌 수 있도록 시스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과 부딪히면서 자본주의는 타협해 왔다. 80년대 이후에는 글로벌한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전개돼 왔다. 그게 위기를 불러온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의 신화 중 하나는 그냥 놔두면 적응 과정을 통해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는 ‘자기조절성’이다. 이것이 도전받고 있다. 자본주의는 성장과 쇠퇴의 사이클이 있고 그 저점(低點)에 이르면 몰락할 잠재적 가능성도 있다. 지금 자본주의가 또 다른 저점을 맞고 있다. 당장에는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는다. 20세기 초 위기 때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역할을 한 부분이 있다. 지금은 월가 점령 시위대가 있지만 상징성만 있다. 정책적 대안을 제시할 힘이 없다.

최배근=자본주의는 하나의 제도고 모든 제도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순기능이 약화됐을 때 변화가 필요하다. 제도는 공동체 구성원의 룰이다. 자본주의가 되면서 가치 창출의 속도가 빨라진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의 장래는 계속적 가치 창출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70년대 이전까지 한국은 산업화를 통해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대다수 국민의 삶의 질을 끌어올린 건 객관적 사실이다. 산업화 이후 자본 수익률이 떨어지면서 찾은 출구가 금융이다. 80년대부터 자본시장 개방으로 나아가는데, 산업화를 통한 자본 수익률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기능이 약화돼 제대로 된 가치 창출이 어렵게 된 상황이다.

손호철=당면한 글로벌 경제위기의 성격은 무엇이고, 미래는 어떻게 될지가 관심이다. 하지만 카오스 이론이나 복잡계 이론, 나비 이론 등을 통해 미래 예측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 되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구조의 일부여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지금의 위기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팍스아메리카나 체제 내의 위기일 뿐이냐, 아니면 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졌던 패권이 중국 같은 새로운 패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냐, 그것도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와 종말이냐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금융자본의 위기는 주기적으로 있었다. 영국이 무너지고 미국으로 넘어갈 때도 일어났다. 금융자본이 나오는 건 (그 체제가) 가을이란 의미다. 생산에 투자해봐야 이윤이 나지 않아 투자할 데가 없다는 거다. 금융은 자본주의의 구세주이면서 독이다. 2008년 경제가 붕괴했을 때 금융을 풀었는데 그게 독이 됐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과잉 축적의 경향이 있어 자체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은 유효 수요가 없어서였다. 당시에는 뉴딜을 통해 노동을 사회로 집어넣으면서 돌파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서 양극화가 되니까 구매 수요가 안 일어난다. 이 경우 새로운 사회협약에 의해 빈부 격차를 해결하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도 자본주의가 아니라 리더십이 문제라는 얘기가 나왔다. 왜 리더십인가. 정치와 경제체제의 불일치 때문이다. 경제는 글로벌해지는데 정치는 국가에 묶여 있다. 돈 있는 독일은 국내 정치에 묶여 유럽의 경제 문제 해결에 선뜻 나서기가 어렵다.

문휘창=유럽의 위기는 자본주의 운영의 문제일 뿐이다. 유럽이 통합하기 전 나라마다 단위가 달라 돈을 바꾸느라 한 달에 30%나 손실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단일화폐가 됐다. 단일화폐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환율 시스템이나 금융 분야의 시장 실패를 따져야 한다. 자본주의는 가치를 창출하는 가장 효율적인 제도다. 단 적절한 관여가 있어야 한다. 정부의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인류는 역사상 민주주의 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보다 더 나은 제도를 찾지 못했다.

한준=자본주의는 국민국가 단위의 거버넌스(governance)도 어려운데 글로벌화하면서 더 어렵게 됐다. 20세기 전반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다퉜는데 시장이 이겼다. 시장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낫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회의 모든 영역이 전부 시장화된 적은 없다. 시장경제가 한계를 보이는 부분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게 거버넌스다. 최근 많은 영역에서 시장의 확장이 이뤄졌다. 공공성에 대한 시장의 침투다. 이에 대한 큰 틀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 나는 사회학자여서 동기부여와 정당성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다. 요새는 비물질적 동기부여가 굉장히 약화돼 있다.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일에서 즐거움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없다. 지나친 물질화와 지나친 불평등화로 동기부여가 사라졌다. 불평등이 동기부여를 약화시켜 자본주의의 엔진을 서서히 꺼버리는 셈이다. 또 하나는 금융이다. 쉽게 돈을 벌고 쉽게 잃으면 인간은 혼란에 빠진다. 동기부여의 정당성에서 끊임없는 문제를 낳는다. 이는 리더십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치와 생활, 문화의 문제다. 동기를 부여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날까 말까를 언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이 생명을 꺼뜨리는 위기냐, 아니면 운동을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아 불거진 문제냐를 되돌아봐야 한다. 몸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손호철=시장이 실패해 대공황이 왔고 국가가 나서서 해결했다. 지금 위기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가. 물론 과거 케인스주의나 복지국가 모델로는 갈 수 없다. 이미 실패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새로운 기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국가 아닌 방식의, 사회가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기제들을 만들어내는 지혜가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시민사회가 되든, 새로운 거버넌스가 되든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개인적으론 자본주의가 먼저 망할지 지구가 먼저 망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웃음) 탈화석문명, 생태, 이런 것들과 관련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자체도 하나의 문명화(civilization)이다. 팽창 중심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의 문명적 전환을 해야 한다.

김종혁=국가 아닌 사회적 통제라는 부분은 일정 부분 공감이 가면서도 어찌 보면 공허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손호철=2000년대 초 김대중 정부 초기 때 한국전력을 민영화하려고 해 반대했다.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전을 팔면 누가 사겠나. 결국 론스타와 같은 외국 자본이 살 수밖에 없다. 당시 주장한 해법은 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 기제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시민단체가 들어가 공기업을 통제할 수 있는 기제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이윤 동기가 아닌 사회적 합리화 측면에서 공기업의 구조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적 통제의 한 방식이다. 그런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최배근=인류는 70년대부터 이행기에 진입했다고 본다. 경제 주체 간 협력, 자율은 모두가 동의하는 좋은 말이지만 지켜나가기가 힘들다. 하지만 개별 단위든, 국가 단위든 각 부문에서 조금씩 싹트고 있다고 본다. 과거엔 경쟁과 개인의 자유를 제도화했다. 지금은 자율과 협동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민주주의도 자율민주주의와 협력이 증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루아침에 대체되는 것이 아니고 이행기를 거쳐 이뤄진다. 사람들의 가치관을 바꾸고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는 하루아침에 급진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대안 역시 바로 합의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변화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정치 리더십도 관련이 있다.

문휘창=자율을 원칙으로 하면서 적절한 조정을 해야 한다는 건 언제나 똑같은 결론이다. 자율의 범위와 종류가 문제일 뿐이다. 기술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게 되자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제조업이 발전하게 됐다. 제조업은 또다시 고용 없는 성장이란 한계에 부닥치게 됐다. 그래서 3차 산업으로 옮아갔는데 미국의 금융업이 대표적이다. 금융도 가치 창출의 기능을 한다. 예컨대 론스타나 칼라일, 블랙스톤(※세계적 사모펀드)이 그렇다. 투기자본에 문제가 없다는 게 아니라 매도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장이 기능을 하게 한다. 제조업에서 3차 산업으로 옮아간 것을 너무 부정적으로 본다거나 운영상 문제점을 자본주의의 본질로 보면 안 된다.

정용덕=자본주의의 위기는 주기적으로 발생했는데, 돌이켜보면 정부가 선도적으로 대응해나간 것이 아니라 문제가 터지면 수습을 하는 시스템으로 위기를 넘어왔다. 이번에도 위기에 적응하면서 새롭게 해결책을 마련할지 아니면 선도적 리더십으로 미리 대처할 방법이 있는지 짚어봤으면 한다.

손호철=국민국가는 ‘큰 문제를 풀기엔 너무 작다(too small for big problem)’고 한다. 일국적 국가 체제가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니면 지구적 통제장치가 필요
한지의 문제다. 오마바 미국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월가 점령 시위가 왜 일어났나. 금융자본의 비용은 사회화되고 이익은 소수가 가져갔기 때문이다. 국가의 성격에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국가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국가가 작으냐 크냐, 강하냐 약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문제 해결을 국가를 통해 할 수밖에 없다면 국가에 대한 민주적, 사회적 통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김종혁=국가에 대한 민주적, 사회적 통제가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손호철=민주주의에 대해 좀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 민주주의를 투표할 때만 주인이 되고 투표가 끝나면 노예가 되는 제도라고 하지 않나. 오바마 정부가 국민 지지를 받았지
만 월가는 오바마 정권에서 이윤을 챙겼다. 미국 국민이 그런 걸 바라고 오바마를 찍었겠나. 그런 분노가 결국 월가 시위가 된 것이다.

문휘창=국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데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개도국, 준선진국, 선진국별로 단계별 모델이 필요하다. 한국은 개발연대 초창기엔 해외자본을 들여다 이자율을 낮게 해 재벌들을 통제했다.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기업들에게 국가의 혜택을 받을 수도 있다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이는 사실 반시장적 행태다. 하지만 개발
도상국이니까 가능했다. 지금 정부가 빵가게까지 직접 관여하고 있는데 부작용이 심해지고 있다.
시민단체들로부터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이들은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한다. 좋은 정부가 먼저고, 시민단체는 정치 지도자가 고려할 수 있는 조언을 하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시민단체가 너무 개입하면 안 된다.

한준=자본주의는 한 마리의 야수다. 야수의 동력은 합리성이 아니라 욕망이다. 역사는 이 야수를 길들여 왔다. 이 야수가 글로벌하게 커졌는데 그럼 사육사도 커져야 한다. 한데 길들이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국가적으로, 정책적으로 규제하는 측면이 있고 사람들이 바뀌는 문화적인 방법이 있다. 모두가 이기적이고 경쟁으로만 가면 인간의 진화적 장점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협동하고 남을 돌보면서 지금까지 공동체를 발전시켜 왔다. 따뜻한 자본주의로도 가고, 도덕적일 수도 있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야수는 점점 커진다. 길들이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자본주의의 미래도 안 보인다.

문휘창=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쓰기 전에 도덕감정론을 썼다. 스미스는 사실 도덕주의자였다. 더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론으로 고민하다 국부론을 쓴 것이다. 도덕성과 경제성 모두 있어야 한다. 사회성과 경제성을 결합하면 된다. 정글에선 패하면 죽지만 사회에선 정부가 보호한다. 가능하면 경제원리대로 하되 경쟁에서 지면 죽는 것이 아니라 지더라도 나눠주는 것으로 가면 되지 않나.

손호철=따뜻한 자본주의를 언급하는데, 순수한 자본의 경쟁논리는 놔두고 사후적으로 복지를 나누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경제의 파이를 늘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최배근=정부를 다시 디자인하자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의 정부 운영 방식과 조직은 산업화의 산물이다. 정부의 효용이 낮아졌다는 게 전 세계적 추세다.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이 원하는 목표를 만들어내고, 달성할 수단을 확보하고, 집행하는 과정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침투 역량’과 ‘추출 역량’이 있어야 한다. 국가가 온전한 기능을 하려면 지역 커뮤니티와 연결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공공성을 담보해내려면 시민의 이해와 협력을 얻어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고전적 국가의 역할로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는 건 진보와 보수 진영 모두가 인정한다. 시장 대체의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관계 영역이 증가했다. 초국가 상황이 불가피한 것이다. 이미 국가의 역할은 진화하고 있다.

손호철=위기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어떻게 대응하느냐와 관련 있다. 구조적 문제 때문에 리더십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초국가적인 최소한의 협력 체제를 만들어낸다면 대응하기 쉽겠지만 낙관적이지 않다. 우리 문제를 얘기해보면 한국의 경제 발전은 냉전적 조건하에서 이뤄졌다. 우리는 서구 모형과 동아시아 모형의 최악의 조합이다. 고용이 불안한데 안전망도 없는 상황이다. ‘최소한 사회적 투자국가’란 식으로 교육·인적자원에 대한 국가의 투자를 과감히 늘리고, 사회적 공공서비스도 확대해야 한다. 외환위기 때 워크 셰어링(work sharing)을 민주노총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워크 셰어링은 덜 생산하면서 덜 소비하고, 덜 풍요롭지만 여유를 찾아갈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나 문화까지도 같이 결합해 고민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문휘창=몇 주 전 일본 언론과 인터뷰했는데 “외국 언론은 한국 기업들이 성공하고 있다는데 한국 언론은 망할 것 같이 말한다”며 뭐가 맞냐고 하더라. 지금이 경제 위기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 경제가 문제지만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한국은 오히려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국내 위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국내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한다고 생각하지만 경쟁은 국제적 단위로 이뤄진다. 삼성은 애플을 이겨야 하고, 한국 중소기업은 대만의 중소기업을 넘어서야 한다. 대기업을 때려잡고 중소기업을 일으키자고 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한준=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위기가 어느 정도 규모인지에 대해 확신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위기가 오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위기를 겪으며 대기업들이 기회를 굉장히 잘 잡았던 반면 중소기업은 구조조정이 되지 않았다. 그 격차를 해결해야 한다. 문화적으로는 성취와 만족도 사이의 괴리가 있다. 국가 제도에 대한 신뢰가 매우 낮은 것도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정용덕=차이가 있지만 시장은 여전히 유효하고 계속된다는 점에서는 합의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장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고 길들이고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국가를 중심으로 했는데 이제는 달라지는 것 같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대 시장의 이분법을 넘어설 가능성도 검토해야 한다. 시민사회처럼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메커니즘이다. 사회적 자본주의도 그렇고 뉴 거버넌스도 그렇다. 국내적 단위가 될 수 있지만 초국가적 단위도 될 수 있다. 한국은 국가와 시장이 긴밀한 연대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시장이 글로벌화되면서 국가가 개입하기에는 어려운 상태가 됐다. 국가 정책결정에 투입되는 요소가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나가야 하고 제3 형태로서의 메커니즘으로 발전해야 할 것 같다.

김종혁=앨런 그린스펀은 “인간의 탐욕은 본성이고 자본주의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원래가 변화를 계속하는 혁신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번에도 위기를 극복하고 변신해나갈지는 알 수 없다. 사회주의와는 별개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정치경제 체제가 과연 가능할지도 관심거리다. 긴 시간 수고하셨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