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 사용설명서 밀라노 FW패션쇼서 미리 본 올 남성복 경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6면

‘버버리 프로섬’의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불황 탓에 우울한 현실을 잠시 잊으라는 듯 영국 신사풍 의상에 해학을 더했다. 모델이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는 오리 머리 모양이다. [밀라노 AP=뉴시스]

‘불황에 대처하는 남자의 옷차림’. 지난달 14~17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2012 가을·겨울 남성복 패션쇼장에서 포착할 수 있는 뚜렷하고 공통된 흐름이다. 각 브랜드들은 유럽 전반에 퍼져 있는 경제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 각자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색상은 전체적으로 어두웠지만 ‘디스토피아’를 그릴 만큼 절망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위축된 남성들을 위로하려는 듯 힘과 권력을 강조하는 표현들도 눈에 띄었다.

불황에 지친 남성들에게 힘을

밀라노 컬렉션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불황을 겪는 남성에게 줄 응원 도구로 ‘힘’과 ‘추억’을 택했다. 브랜드 ‘프라다’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자신의 컬렉션이 “‘힘(power)’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패션쇼 무대에 에이드리언 브로디, 게리 올드먼, 팀 로스, 제이미 벨 등 할리우드 스타들을 모델로 올렸다. 붉은빛이 감도는 검정 코트를 입은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특유의 무심한 듯 건방 섞인 걸음걸이로 남성적인 매력을 뽐냈고, 게리 올드먼은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이들 배우가 무대에 섰을 땐 배우들이 뿜어내는 ‘힘’에 압도된 듯 객석에서 열렬한 환호가 쏟아졌다.

 브랜드 ‘돌체&가바나’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강인한 남성을 주제로 삼았다. 과거 귀족들이 입었을 법한 화려한 금박 장식이 들어간 벨벳 코트를 입은 모델이 힘있는 테너가 부르는 오페라 음악에 맞춰 무대를 누볐다. 디자이너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는 이번 컬렉션에 대해 “진짜 이탈리아 남자를 표현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의 화려한 추억을 상기시키겠다는 의도다.

 브랜드 ‘보테가베네타’에선 굽 높은 정장용 구두가 힘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됐다. 정장 차림의 모델 대부분이 기본 7㎝ 정도 되는 남성용 하이힐을 신고 등장했다. 부츠를 제외하고는 겉으로 보이도록 남성용 하이힐을 제작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일부러 거의 모든 착장에 이런 차림을 가미한 것은 ‘높이=힘’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1 ‘구찌’의 벨벳 재킷 2 ‘돌체&가바나’의 남성용 속옷은 허리선이 높은 복고풍으로 강인한 남성을 연상시킨다. 3 ‘살바토레 페라가모’에선 진홍색을 뜻하는 ‘버건디’ 계열 색상을 다양하게 활용했다. 4 ‘에트로’식으로 밝고 경쾌하게 선보인 ‘버건디’ 색상 의상. [밀라노 AP=뉴시스]

희망과 현실 사이

그렇다고 모든 브랜드가 ‘남성들이여 기죽지 말라’는 선언을 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론 힘을 북돋우면서도 다른 편에선 여전히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브랜드 ‘질샌더’의 디자이너 라프 시몽은 자신의 이번 컬렉션이 “요즘 남성성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장한 듯 길이가 길고 어깨 부분이 커다란 가죽 재킷을 입은 모델에게 폭 좁은 넥타이를 매게 했다. 또 중후한 정장용 울코트의 어깨 부분에 도마뱀 무늬를 넣었다. 그는 자신의 의도가 “죌 것이냐(control) 아니면 풀 것이냐(release)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힘있고 싶은 남성적 욕망과 불안한 경제적 현실 사이의 갈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이다.

 ‘구찌’의 디자이너 프리다 지아니니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옷을 디자인했다. 그는 이번 패션쇼에 대해 “겉은 자신만의 자연스러운 스타일이지만 내면은 고통받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풀어헤친 셔츠로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깃을 세운 재킷으로 방어심리를 드러내는 등 심경이 복잡한 남성들의 모습이 구찌 패션에서 드러났다. 또 어깨선이 강해 보이는 코트를 입은 모델이 여성적인 가방을 메고 등장하기도 했다.

차분한 색상, 점잖은 분위기가 대세

색상 변화도 두드러진 변화였다. 남성복 패션쇼를 따로 여는 두 개의 도시,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밀라노를 비교하면 후자는 전자보다 색감이 화려한 편이었다. 파리 남성복 패션쇼에서 검정·회색 등 무채색이 주를 이룬다면 밀라노에선 빨강·노랑 같은 원색이 과감하게 사용돼 왔다. 하지만 올가을·겨울용 밀라노 남성복 패션쇼 의상은 대부분 검정·회색으로 채워졌다. 정장류야 원래 무채색이 강세라지만, 셔츠나 조끼까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조합이 많았다. 코르넬리아니·살바토레 페라가모·보테가 베네타 등의 브랜드에서 이런 경향이 뚜렷했다. 검정 재킷 안에 그보다 약간 덜 짙은 검은빛 조끼, 여기에 회색 셔츠와 검정 타이 같은 조합이 그것이다. 전엔 이런 경우에도 타이나 셔츠를 화려한 색상으로 배치했는데, 올핸 그 숫자가 크게 줄었다.

  무채색 외에 유행 색상으로 꼽을 만한 색으로는 ‘버건디’가 눈에 띄었다. 진홍색 혹은 암적색을 이르는 버건디는 벽돌색부터 연보라까지 계열을 달리해 가며 온통 차분한 색상들 가운데 유일한 활력소 역할을 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