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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공약, “똑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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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지난달 24일(미국시간)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통해 ‘경제민심’을 잡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다. ‘공정한 기회(fair shot)’와 ‘공정한 나눔(fair share)’의 강조로 돌아선 민심을 되돌리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세제(稅制)였다. “내 세율이 내 비서보다 낮은 것은 불공평하다”는 워런 버핏의 말을 언급하며 200억원이 넘는 연 투자소득을 올리고도 13.9%밖에 세금을 내지 않은(임금소득의 경우 35%를 내야 함) 공화당의 유력 후보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대선을 향한 민심 장정(長征)의 출정식을 알리는 연설이었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앞둔 우리 정치권에서도 경제민심 잡기 경쟁이 한창이다. 여야 할 것 없이 1% 대 99% 현상에 대한 성난 경제민심을 잡기 위해 재벌세와 복지, 경제민주화 등이 비책(秘策)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대립축이 분명한 미국과는 달리 여야 간에 차별성이 안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경고처럼 같은 비책을 내놓고도 “어떤 군주는 성공하고 어떤 군주는 실패”하는 일이 벌어질 판이다. 민심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 초미의 관심사다.

 권력과 민심의 관계는 정치의 영원한 테마다. 당(唐) 태종의 공신(功臣)이었던 위징(魏徵)은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물 위에 뜬 배이며, 민심이 흔들리면 배가 뒤집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민심의 중요성은 정치체제를 초월하여 통용되는 공통의 인식이다. 마키아벨리는 절대적인 민심의 지지를 받았던 군주에게 “최악의 사태는 민심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라 했다.

 500만 표 차이가 나는 절대적인 지지로 탄생한 이명박 정권이 민심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말할 것이다. 최악의 사태라고.

 권력이란 ‘달콤한 꿀’과 같다. 그래서 권력은 항상 자기도취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권력의 자기도취 현상은 정치가의 내면에 싹트는 ‘너무나 인간적인 적(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인간적인 적과의 부단한 투쟁 여부가 권력의 성패를 결정한다. 정치가가 권력임무를 망각한 채 권력도취에 빠질 경우 타락과 부패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로 5년마다 목격하는 우리 정치의 모습이다. 지난번 정권이 코드정치로 인한 민심이반에 ‘폐족(廢族)’을 선언하더니 이번 정권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중앙일보 사설(1월 30일)의 지적처럼 “하산 길의 ‘도덕적 패잔병’ 속출”로 폐족을 선언해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이 되풀이되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지금 우리 정치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민심을 잡는 첩경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우리만의 관심 사항이 아닌 듯하다. 민심의 중요성을 알 리 없는 북한군 정찰국장인 김영철이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우리 정보 당국이 천안함 침몰사건의 기획 실행 주모자로 지목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2008년 12월 개성 공단에 내려와 TV 드라마 ‘이산’에 나온 위징의 말을 인용, “민심이 흔들리면 배가 뒤집힌다”며 우리 정부를 공격했다 한다(중앙일보 2011년 12월 28일).

 테러와 미디어 조작으로 통치하는 독재국가에서 민심이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심의 뒷받침 없이는 효과적인 지배를 할 수 없다. 아니, 아예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책 합리성을 무시하고 감성적인 민심을 따르다 보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반대로 정책 합리성에만 매달리다 보면 민심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정치가 직면한 딜레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여야 할 것 없이 이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공약의 실현 가능성은 제쳐둔 채 선거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만 매달려 있는 인상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비전의 경쟁은 사라지고 ‘다음 선거’를 위한 달콤한 말들의 경쟁만 눈에 띈다.

 하지만 같은 비책을 들고 나오더라도 승패를 가리는 심판은 결국 민심의 몫이다. 민심이 달콤한 말들의 실현 가능성을 꼼꼼히 따져 올바른 선택을 하느냐 못 하느냐에 우리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경고했다. “새로운 지상의 삶을 시작하는 영혼들이여! 당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수호신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당신들이다. 그래서 책임은 선택한 당신들에게 있으며 하늘에는 그 책임이 없다”고. 우리 민심이 지금 이 운명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