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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문이근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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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섣달 그믐날의 8시간에 걸친 긴 산행 탓이었는지 곤한 잠에 빠졌다가 맞은 흑룡해의 첫 아침은 유난히 맑고 상쾌했다. 하지만 곧장 일어나지 않고 이부자리 안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뇌리를 스친 한 문장 때문에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 한 문장은 다름 아닌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찬찬히 다시 읽은 『논어(論語)』 ‘자장(子張)’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이렇다. 자하가 말했다.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서부터 생각해 나가면 인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 삶을 살아갈 때 피할 수 없는 것이 물음이다. 절실한 물음이 없으면 삶이 물렁해진다. 그 물음의 절실함만큼 삶은 단단해진다. 절실한 물음이란 삶의 무게를 담고 있는 질문이다. 묻는다는 것은 단지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물음을 통해 더 단단한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절실한 물음은 힘이 있다. 그것은 문제를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치고 마침내 깨는 힘이다. 삶은 숱한 벽과 난관에 가로막혀 있다. 하지만 절실한 물음은 그것을 적당히 얼버무려 우회하거나 구렁이 담 넘듯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파벽(破壁)한다. 즉 가로막힌 벽을 깬다. 그리고 돌파한다.

 # 절실한 물음이 있은 연후엔 생각을 해야 한다. 그 생각은 먼 데서가 아니라 가까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 한마디로 ‘근사(近思)’다. 1175년 주희(朱熹)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9824>), 정호(程顥), 정이(程<9824>), 장재(張載) 등 네 학자의 글에서 학문의 중심문제들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부분들을 뽑아 편집한 책명이 『근사록(近思錄)』이다. 이전에는 ‘근사’의 참뜻이 뭔 줄 몰랐다. ‘절문이근사’의 구절을 익히고 나서야 비로소 ‘근사’의 깊이와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아무리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펼쳐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배태되어 나오는 생각과 말과 글이 아니면 사람들을 울릴 수 없다. 일상의 소소하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대단한 인식의 경지요 진짜 무서운 힘이다.

 # 물음이 절실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에 대해 깊이 천착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루 널리 배움 없이 깊이 천착하기란 불가능하다. 땅을 파더라도 넓게 파 들어가야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너무 좁게 파 들어가면 자칫 판 구멍 자체가 막힐 수 있어 되레 위험하다. 아울러 뜻을 돈독하게 함은 의지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확고한 의지를 갖기 위해, 결정적 순간에 후회 없는 판단을 내리기 위해 절실하게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널리 배워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서부터 구체적으로 생각해 나가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기 마련이다. 이때 인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면 불인(不仁)이 무엇인지 알면 된다. 불인은 수족마비와 같은 불통이다. 인하면 통하고 불인하면 불통한다. 그래서 절문이근사, 즉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인이 그 가운데 있어 통하기 마련이다.

 # 자고로 질문이 절실하면 반드시 그 안에 답이 있다. 질문이 허접하면 답도 허술하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이란 말이 있지만 실은 절문현답(切問賢答)이 있을 뿐이다. 절실한 물음의 답을 먼 데서 찾는 이는 하수(下手)다. 답은 항상 가까운 데 있다. 어설프고 섣부른 이들이나 먼 데서 요란스레 떠들며 답 찾는 시늉을 한다. 그런 이들은 진짜 문제가 뭔지도 모른다. 문제해결의 모든 실마리는 내 안에 있고 가까운 데 있으며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찾아지는 법이다. 지금 우리에겐 어떤 절실한 물음이 있는가? 과연 이 흑룡해에 우리는 어떻게 물으며 나아갈 것인가. 정말이지 절실하게 물으라. 그리고 가까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라. 미래가 열리고 해법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