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발명가 꿈꾸다...이병주 만나 ‘전향’,열여섯에 소년 급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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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호 31면

이형기 시인의 1998년 모습. [사진 중앙포토]

광복 이후 한국 문단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등단한 문인은 누구일까. 시인 이형기다. 그는 1949년 진주농림학교 5학년이던 만 열여섯 살 때 ‘촉석루 예술제’ 백일장에서 시 ‘만추’로 장원(삼천포중학교 학생이던 동갑내기 박재삼이 차상이었다)을 차지한 데 이어 서정주 추천으로 당시 유일한 문예지였던 ‘문예’에 ‘비 오는 날’로 첫 추천을 받았다. 이듬해 열일곱 살 때 ‘코스모스’ ‘강가에서’ 등으로 추천 완료돼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농림학교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이병주가 65년 마흔네 살 때 소설가로 등단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28년이나 빨랐던 셈이다. 그 어린 나이에도 이형기는 등단 초기 자연에 대한 순응을 주조로 하는 원숙한 서정시를 잇따라 발표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3> 최연소 등단, 이형기 시인

1933년 경남 사천 태생인 이형기는 어릴 적부터 꿈이 많았다. 가수가 노래하는 것을 보면 가수가 되고 싶었고, 운동경기를 보면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서커스 공연을 보면 그 단원이 되고 싶었다. 발명가가 되고 싶어 화공약품을 사다가 이런저런 실험을 해본 적도 있었다. 생계에 보탬이 될 만한 직업을 갖기 위해 농림학교에 진학했다가 영어교사였던 이병주를 만나게 된 것이 문학에 뜻을 두게 된 계기였다. 이형기는 그때부터 시라는 ‘덫’에 걸리면서 평생 시 속에 파묻혀 살게 됐다.

이형기는 저돌적이라고 할 만큼 매사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은 등단 초기부터 그대로 드러났다. 등단하던 해인 50년 9·28 서울수복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문단 실력자인 조연현 ‘문예’지 주간을 찾아간 것이 좋은 예다. 인연이라고는 ‘문예’지 50년 신년호에 조연현이 49년 시단 총평을 쓰면서 이형기의 첫 회 추천작을 격찬한 것이 고작이었다. 조연현은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열일곱 살짜리 시골 소년을 따뜻하게 맞아 여러 날 그의 집에 머물도록 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훗날 이형기는 조연현의 조카뻘 되는 여성과 부부가 된다.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51년에도 그는 적수공권으로 무작정 피란지 부산으로 건너가 학자금 대책도 없이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하는 과감성을 보였다. 입학 후에는 휴학과 복학을 되풀이하면서 출판사의 편집 교정 수금 따위의 일로 등록금을 충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가 동국대를 졸업한 이형기는 부산 국제신문의 서울 주재기자로 일하면서 20대 초반의 나이에 중앙문단을 주름잡았다. 등단 서열을 무시하지 못하는 문단 풍토에서 ‘최연소 등단 기록 보유자’였던 덕분에 등단 시기가 비슷해도 나이가 훨씬 많은 문인들과 흉허물없이 교분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 든 문인들 가운데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우리네 관습적 미덕을 무시하는 그의 언행을 못마땅해 하거나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도 없지 않았다.

55년 김관식, 이상로와 함께 3인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를 펴낸 이형기는 57년 ‘한국문학가협회상’을 받기에 이른다. 그의 나이 겨우 24세였다.
60년대 들어서면서 이형기가 보인 과감한 문단 활동도 문단의 시선을 집중케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초반부터 문단에 거센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킨 ‘순수·참여 논쟁’에서 순수파의 선봉으로 맹활약하는가 하면, 조연현이 70년대의 문단 권력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훗날 그가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 몇몇 문학단체의 수장이 되고, 대한민국문학상 등 몇몇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그런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보들이 오히려 그의 문학적 재능을 훼손했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거나 이형기는 문우들의 표현을 빌리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평생을 바쁘게 살다 간 사람이었다. 그는 8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20여 년은 언론계에서 일했고, 그 이후의 10여 년은 대학 교수를 지냈다. 언론계는 국제신문을 시작으로 서울신문, 대한일보 등 5,6개 사를 거쳐 국제신문 서울지사장으로 재직 중 80년 언론통폐합으로 언론계를 떠났고, 대학은 부산산업대를 거쳐 모교인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대학 재직 중에는 문학이론에 몰두해 '한국문학의 반성''시와 언어'등 평론집과 이론서를 펴내기도 했다.



정규웅씨는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사람들>을 펴냈다.

이형기는 어린 나이에 등단하기는 했지만 과작의 시인이었다. 94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질 때까지 45년 동안 그는 300여 편의 시를 썼고, 6권의 시집을 냈다. 7, 8년에 한 권꼴이다. 60대에 접어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업에 매달릴 생각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당뇨 등 합병증으로 기나긴 투병생활에 들어간다.

한데 병세가 깊어질수록 시에 대한 열정은 샘솟듯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이형기는 정신이 맑아지면 끊임없이 입으로 시를 읊었고 아내는 그것을 받아 적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시가 40여 편, 여기에 ‘시를 위한 아포리즘’이라는 제목의 짧은 산문들을 곁들여 일곱 번째의 마지막 시집 ‘절벽’을 펴낸다. 쓰러진 지 4년 만인 98년의 일이었다. 그 뒤로도 그는 “시를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며 삶에 강한 의지를 내보였으나 병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2005년 2월 숨을 거두었다. 7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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