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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 사고도 책임져라? 아기 받기 꺼리는 산부인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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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충북 영동군 양강면 정은주(36)씨는 지난해 10월 중순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영동병원에서 셋째 부경이를 순산했다. 임신 6개월까지 옥천군에 있는 산부인과에 승용차로 한 시간을 오가며 진료를 받았다. 이런 고생이 지난해 7월 사라졌다. 정부 지원 덕분에 영동병원에 산부인과가 생기면서다. 정씨는 “새벽이나 주말에 산통이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가까운 데에 산부인과가 생겨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영동군에서 지난해 8월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4년 만에 울려퍼진 뒤 부경이를 비롯해 24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전에는 애 낳는 데가 없어 옥천·대전으로 나가야 했다. 아직도 강화·평창·함양 등 49곳 시·군의 임신부들이 원정 출산을 한다. 저출산 때문에 산부인과 전공의 확보율도 2003년 99.6%에서 지난해 65.6%로 떨어졌다.

 출산 환경이 악화되는 가운데 산부인과 의사들이 4월 시행 예정인 의료분쟁조정법을 문제 삼아 분만 포기를 선언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가 최근 4년차 산부인과 전공의 60명에게 분쟁조정법이 시행된 뒤 분만을 계속할지를 물었다. 이 중 분만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지망한 35명 중 23명이 “분만을 포기하겠다”고 답했다. 9명은 “고민 중”이라고 답했다. 분만 전문의가 되려던 의사의 90%가량이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마련 중인 의료분쟁조정법 시행령은 의사가 주의 의무를 다했는데도 불가항력적으로 생긴 분만 사고에 한해 최고 3000만원 이내에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신생아가 숨지거나 뇌성마비에 걸리거나 산모가 숨진 경우다. 뇌성마비는 2010년 1154건, 신생아 사망은 177건, 산모 사망은 3건 발생했다. 여기에 연간 59억~140억원이 필요하다. 이 돈을 정부와 산부인과 의사들이 절반씩 부담하기로 하자 반발하는 것이다. 산부인과는 분만 건당 진료비(평균 89만원)의 0.76~1.81%를 내야 한다.

 대한산부인과학회 신정호(고대구로병원 산부인과 교수) 사무총장은 “불가항력적 사고는 의사의 과실이 없다는 뜻인데도 보상금을 부담하라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저출산 극복이라는 사명감으로 버티는 산부인과 의사의 사기를 꺾는 일”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료분쟁조정법에 국가와 의료기관이 재원을 부담할 수 있게 돼 있다”며 “산부인과가 어려운 줄 알지만 국민을 위해 동참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불가항력적 의료사고 피해 보상제도를 도입한 나라는 많지 않다. 스웨덴·뉴질랜드·일본과 버지니아·플로리다 등 미국의 일부 주만 시행한다. 대상 사고 범위와 재원 마련 방법은 다양하다.

◆의료분쟁조정법=의료사고가 났을 때 환자가 직접 조사해 소송에 매달리는 애로를 줄이기 위해 1988년 첫 논의 이후 23년 만에 만들어졌다. 의료분쟁중재원에서 조사해 90일(30일 연장 가능) 내에 조정안을 낸다. 의료기관과 환자가 동의하면 형사처벌이 면제된다. 올 4월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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