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얘기’ 질렸거든... 저주받은 300억짜리 걸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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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호 16면

강제규 감독이 감행했던 대규모 실험 ‘마이웨이’가 참혹한 실패로 끝나가고 있다. 매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럴 줄 알았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있다. 공통점은 양측 모두 흥행 스코어에 크게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봉 전 국내에서 1000만 관객을 모아야만 손익분기점에 이른다는 얘기를 했을 때 충무로에선 다소 불안해했던 것이 사실이나 200만 명에 그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

만약 영화 감독마다 ‘나의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리스트가 있다면 강제규 감독에게는 이 영화 ‘마이웨이’가 단연 순위 맨 위로 올라갈 것이다. 할리우드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에겐 ‘어비스’(1989)라는 영화가 그렇다. 캐머런은 이후 ‘타이타닉’(1997)과 ‘아바타’(2009) 등으로 보란 듯 재기했다. 충무로에도 장선우 감독 같은 인물이 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으로 장 감독은 여전히 영화권 밖에서 침묵 중이다. ‘국민 감독’으로 분류되는 강우석 감독도 뼈아픈 작품이 없지 않다. 강 감독 스스로는 ‘한반도’(2006)를 ‘저주받은 작품’으로 분류할 것이다.

강제규 감독이 향후 캐머런이나 강우석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장선우의 영화적 삶을 답습할 것인지 답을 내리기는 아직 성급해 보인다. ‘마이웨이’에 대한 궁극적 평가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이웨이’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물량 공세’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건 편견이다. ‘마이웨이’는 대규모의 물량을 효과적으로 쓴 작품이다. 이 영화만큼 돈 들인 공력이 돋보이는 작품도 없다.

노몬한 전투와 독일-소련 간 전투, 노르망디 전투 등 영화의 큰 줄기를 구성하는 세 전투 신은 할리우드의 기술력과 견줘도 거의 손색이 없을 만큼 빼어나다. 전투 신마다 감독은 풀 샷과 부감 샷, 익스트림 클로즈업 등 다양한 샷을 자유자재로 구성하며 강약의 리듬감을 파도처럼 살려낸다. 원 샷, 투 샷, 스리 샷을 뒤섞으며 이를 몹 신(mob scene)의 앞뒤로 배치함으로써 격렬한 전투 상황에 빠져 있는 각 개인의 공포와 전체의 광기를 효과적으로 중첩시킨다. 주인공들이 사형 직전 소련군으로 편입돼 독일과의 전투에 총알받이로 나가게 되는 장면은 마치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1969)를 보는 느낌을 준다. 노르망디 전투에 관한 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가 최고였다면 이제 한 편의 영화를 더 추가해야 할 것이다.

스토리가 빈약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반대로 다소 과잉의 이야기 구조가 문제였다고 보인다. 예컨대 노몬한 전투 직전 준식(장동건)이 장교 다쓰오(오다기리 조)에게 항명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다.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척, 새벽에 동료와 탈출을 감행하는 내러티브가 더 현실적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마이웨이’의 실패는 비장한 역사의식과 그 진정성이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는 시대의 굴곡에서 비롯된다. 지금의 사람들은 역사성이나 대의, 진실 따위의 ‘큰 얘기’를 믿지 않는다. 대중이 자꾸 개인화된 ‘작은 얘기’, 예컨대 멜로적 정서에 매달리는 건 차라리 그것이 더 솔직하고 진실된 얘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이웨이’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의 실패는 충무로 전체로 봤을 땐 한 걸음의 진보와 진화를 위한 두 걸음의 후퇴다. 추측하건대 많은 다른 영화가 ‘마이웨이’의 과실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마이웨이’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옹호하고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노몬한 전투
1939년 5월부터 8월까지 몽골과 만주국 접경 지역에서 벌어진 일본과 소련 몽골 연합군 간의 대규모 충돌사건. 소련이 대규모 탱크부대를 투입해 일본의 참패로 끝나면서 주인공 준식(장동건)은 소련 포로수용소로 끌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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