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혁명…디지털 지상파 9월 초 첫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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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바보상자란 오명을 벗어던진다.그리고 각 가정의 정보기지로 발돋움한다.또 영화관과 한바탕 자웅을 겨룬다.TV가 홈시어터로 거듭나는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그렇다고 먼 미래의 얘기도 아니다.길게 잡아 앞으로 10년 내에 벌어질 일대 ‘사건’이다.

즐거운 상상을 한번 해보자.2006년의 어느날 아침.펀드매니저 K씨는 눈을 뜨자 마자 TV를 켠다.인터넷에 연결된 TV에서 미국 월스트리트의 증시상황을 둘러보고 이날 오전에 열릴 투자 전략회의를 준비한다.

번역가로 일하는 아내는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다.지난밤에 밀린 원고를 마무리 하느라 피곤했나 보다.K씨는 어제 저녁 TV로 주문한 피자 한조각을 덥썩 물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선다.그리고 회사에 출근해 아내에게 e메일을 띄운다.

집에선 아내가 e메일을 역시 TV로 검색한다.“여보! 우리 조금만 힘내자.사랑해”란 메시지가 브라운관에 뜬다.입가에 웃음이 스르르 번진다.

TV의 혁명이 시작된다.다음달 3일 방송의 날을 전후해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화가 이뤄지는 것.기술적으론 전송방식이 애널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지만 일상에 미칠 영향력은 대단하다.

KBS 편성국 김영신 부장은 “흑백과 컬러TV를 생각해 보자.지금 흑백TV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아날로그 TV를 시청하는 사람은 급격하게 줄어든다.방송의 디지털화는 컬러TV의 출현보다 훨씬 강력한 충격을 불러일으킬 것이다”고 말했다.

디지털 TV는 고화질·고음질을 자랑한다.브라운관의 주사선이 기존의 아날로그 TV(5백25개)보다 두 배 가량 많은 1080개에,화면의 선명도를 표시하는 화소(畵素)수도 아날로그(30만)와 비교할 수 없는 수치인 2백만으로 껑충 뛴다.

예컨대 축구경기를 시청한다고 가정해보자.극장식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대형화면(가로 세로 16대9,기존 TV는 4대3)에서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낱낱이 감상할 수 있다.지금의 축구중계에선 방송사가 편집한 화면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으나 디지털 TV에선 일반 시청자가 특정 중계 카메라를 선택해 그 카메라가 잡은 부분만을 볼 수도 있다.

영화는 어떤가.요즘 TV에선 가끔씩 예술영화를 방영할 경우 브라운관의 상하를 공백으로 처리해 작품을 보여주는 일이 있는데 디지털 TV에선 그럴 일이 없다.영화와 브라운관의 화면비율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현재 일반영화를 방송할 때 잘라버리는 좌우측 화면도 복원된다.한때 유행했던 CF를 원용하면 “어 저 사람 저기에 숨어 있었군요” 식이다.여기에 돌비 서라운드 음악까지 가세하면 말 그대로 작은 영화관이 된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다.자연이건 인물이건 실물 그대로 재연된다.한국의 자연풍경을 디지털로 준비하고 있는 KBS 이장종 PD는 “자연의 미묘한 색감을 잡아내 화면 전체가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멀리 떨어진 사람의 윤곽도 또렷하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현재 지상파 방송사들은 디지털방송 준비에 한창이다.일단 기존의 아날로그 프로그램을 디지털로 전환해 방영하고,앞으로 디지털 방송 전용 프로그램을 늘려나갈 계획이다.디지털 프로그램 제작비가 아날로그보다 서 너 배에 달해 모든 방영물을 디지털로 만들 수 없어 우선 드라마·자연다큐·스포츠중계 등에서 시험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문제는 아직 디지털TV 수상기 보급률이 극히 미미하다는 점.가전업계의 추산도 5만대 미만이다.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형 화면일 경우 1천만원을 상회하는 가격부담도 만만치 않다.다만 디지털 방송이 활성화하고 대량생산 체제가 갖춰지면 가격은 많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연기자도 방송사도 비상이다.여드름 자국까지 일일이 잡아내기에 고도의 분장술이 필요하고,세트·소품 등도 정교하게 만들어야 한다.자칫하면 “얼굴이 뭐 저래”“저 물건 가짜 아냐”식의 반응이 튀어나올 수 있다.하룻만에 무대를 뚝딱 짓고 그럭저럭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현행 방식으론 디지털 시대를 버텨나갈 수 없다.

디지털 방송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방송과 통신기술이 결합하면서 지금까지 TV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가 펼쳐진다.

일례로 드라마를 보면서 특정 탤런트를 클릭하면 그의 경력·신상 등을 한눈에 확인하게 된다.또 그가 입고 있는 옷,차고 있는 액세서리 등을 TV에서 즉시 구매할 수 있다.소위 데이터방송 시대가 만개하는 것이다.

TV에 인터넷이 연결되면서 교육·의료 등도 TV로 간단하게 해결한다.게임·날씨·주식 등 각종 부가정보가 서비스되는 것이다.특히 내년으로 예정된 디지털 위성방송이 가세하면 TV의 위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만큼 높아질 것으로 점쳐진다.

하지만 국내에서 데이터 방송을 만끽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MBC 편성기획부 안광한 부장은 “제작비 부담과 콘텐츠 부족,그리고 미미한 수상기 보급률 등으로 지금 당장 데이터 서비스에 나설 수 없다”며 “아마도 5년 쯤 지나야 디지털 TV의 기능을 제대로 구현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디지털방송의 약진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1998년 9월 세계 최초로 지상파 디지털방송을 실시한 영국에선 지금 디지털 열풍이 불고 있다.위성방송 가입자를 포함한 숫자이긴 하지만 최근 영국 BBC는 다섯 집에 한 집꼴로 디지털 수상기를 보유한 것으로 보도했다.또 TV를 통한 홈쇼핑·홈뱅킹·e메일 등 부가서비스 이용자도 점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세대 강상현(신문방송학)교수는 “디지털방송은 우리 방송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전파 선진국에 들어가는 길”이라며 “경제적으로도 우리 가전제품이 국제 경쟁력을 선점하는 계기가 된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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