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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내리는 서울 국제다큐영상제

중앙일보

입력

국내 유일의 다큐멘터리 영화 전문 축제인 서울 국제 다큐멘터리 영상제가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올해로 4회째를 맞아 국내 부문 공모작 수준이 몰라보게 향상한 것이다. 주최측인 Q채널의 김하늘 PD는 "장기간 취재하고 편집에도 공을 들인 작품이 많다"며 "우리 다큐멘터리가 성숙해가는 증거"라고 말했다.

지난 7월부터 8월 초까지 접수된 작품은 총 54편. 주최측은 이 가운데 본선 진출작 12편을 엄선하고 다음달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영상제에서 선보일 계획이다.

외국의 화제작 60여편도 함께 상영한다.

가장 주목할 특징은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다양해졌다는 점. 예전의 출품작이 주로 인권·여성·노동 등을 다루며 사회고발적 성격이 강했다면 올해엔 육체·가족·장애인 등 일상사로 시야가 확대됐다. 비유컨대 다큐멘터리의 중심축이 '운동'에서 '예술'로 이동한 것이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작업하고 있는 김진아씨의 〈빈 집〉을 보자. 김씨는 비디오 카메라로 일기를 쓰는 독특한 습관을 갖고 있다. 대학 4학년 때 거식증에 걸린 이후 벌인 '육체와의 투쟁' 5년을 화면에 담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폭식으로 가득 불러오른 배, 구토제를 남용해 쓰러진 모습, 공포에 사로잡혀 온 집안의 틈새를 더듬는 장면 등을 냉정하게 기록했다.

뉴욕 지하철역에서 연주를 하며 살아가는 두 기타리스트를 그린 〈뮤직 언더 뉴욕〉도 흥미롭다.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는 박원영씨는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몇 푼의 동전으로 삶을 지탱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이모저모를 생생하게 포착했다.

김PD는 낙선작 가운데도 "춤·노래·게임·DDR·사물놀이 등을 다룬 작품이 많았다"며 "소재의 다양화는 다큐멘터리 발전의 첫번째 관문"이라고 설명했다.

사회문제를 다루더라도 목소리는 낮아졌다. 설명조의 내레이션으로 관객을 설득하려는 대신 눈앞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며 작품의 객관성을 살렸다.

전문용어를 빌리면 '소셜 액터(Social Actor)'의 역할을 충분히 활용한 것. 전문 연기자가 전달하기 어려운 일상의 속내를 일반인의 꾸미지 않은 모습을 통해 전달한다는 뜻이다. 그런 만큼 설득력도 크다.

김성환씨가 출품한 〈동강은 흐른다〉가 그런 경우. 영월댐 건설 발표 이후 동강변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한 일가가 겪는 1년의 변화를 담았다.

환경·자연·인간·가족·농촌 등을 두루 얘기하되 제작자의 음성은 화면 뒤로 숨는다. 70대 후반의 노부부와 39세의 노총각 아들의 육성을 앞세워 동강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김진열씨의 〈땅, 밥 만들기〉도 비슷하다. 이미 한계선을 넘어버린 이농문제를 직시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강요하지 않는다. 농촌을 지키는 부모와 도시로 모두 떠난 가족들의 대화·갈등을 통해 관객들이 우리 농촌현실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한다.

카메라 앵글을 한국사회 밖으로 확장한 것도 특징이다.

김대근씨의 〈농파짠에서 살아가기〉는 태국·미얀마·중국의 국경 산악지대에서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리수족의 얘기를, 박두병·김이찬씨의 〈데모크라시 예더봉〉은 고향땅 미얀마에서 쫓겨나 1998년 말부터 한국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고단함을 그리고 있다.

김소영씨의 〈하늘빛 고향〉은 제작에만 3년 이상을 투자해 주목된다.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고려인 화가 신순남씨를 통해 18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러시아 한인들의 이주사를 정리했다.

음악·녹음·색보정 등 후반 작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6㎜ 필름으로 찍은 김씨는 일반극장 상영에 대비해 35㎜ 필름으로 블로업(blow-up:확대복사)할 예정이다.

오랜 만에 '맛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끽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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