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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여인 그리다 골병…'퍼펙트 화이트’의 저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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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물의 색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 중의 축복이다. 우리 일상은 사물들이 가진 다양한 색으로 채워져 있다. 색은 경험 자체다. 진홍빛에서 시작돼 회청색과 보라색을 넘어가 마침내 검파랑으로 종결되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색을 다루는 색채학은 신생 학문이다. 디자인에서의 색 조합, 색채 테라피 같은 실용학문의 성격이 강하다. 건축, 의복, 각종 디자인, 다이어트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색이 거론되기 때문에 오히려 색채학에서 순수미술이 차지하는 부분은 크지 않다. 튜브에서 짜낸 물감이 아닌 바에야 색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질감과 형태 등과 연관돼 인식된다. 예컨대 “검은 밤, 하얀 뼈, 붉은 피…”처럼 색에 대한 인식은 체험 대상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색에 대한 관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문화적으로 변화해 왔다. 색에 대한 흥미로운 책으로는 에바 헬러의 『색의 유혹』(예담, 2002, 1만7600원)과 빅토리아 판레이의 『컬러 여행』(아트북스, 2005, 1만6500원)을 들 수 있는데, 아쉽게도 이 책들은 현재 절판 상태로 도서관에서만 읽을 수 있다.

심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13가지 색을 기호도, 사회역사적 측면, 문화심리적 측면에서 다양하게 훑어보고 사전적으로 정리해 준다. 색에 대한 관념은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노랑은 중국에서는 황제의 색으로 귀하게 여기지만, 서양에서는 시드는 풀의 색 즉 배신자의 색으로 여겨져 선호되지 않는다. 저자가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세계인이 가장 선호하는 색은 파란색이다. 삼성 등 글로벌 기업 로고의 대부분이 파란색을 채택하는 이유다.

그러나 파랑이라고 다 같은 파랑이 아니다. 가장 고귀한 파랑은 성모 마리아의 옷을 그릴 때 쓰는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다. 울트라마린은 원래 ‘바다 건너’라는 뜻으로, 재료가 되는 청금석은 전량 중동에서 수입했다. 16세기 당시 고귀한 광채를 내는 극상의 푸른색을 얻을 수 있는 청금석은 황금보다 비쌌다. 너무 비쌌기 때문에 울트라마린은 19세기 중엽 화학염료로 곧바로 대체된다. 파랑이 제왕의 자리를 내놓고 서민적인 분위기로 돌변해 ‘블루 컬러’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은 값싼 파란색 안료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쪽이라는 식물에서 얻어내는 인디고 블루는 영국의 식민지 무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식량을 재배해야 할 땅에 쪽을 재배할 것을 강요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인디고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흔한 색으로 잠시 시들했던 인디고 블루가 다시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청바지의 대대적인 유행 덕분이다. 이 정도면 현대를 ‘인디고 블루의 시대’라 할 만하다.

홍경택39존레넌(2007), 145*145㎝ , 사진 작가 제공

『컬러 여행』의 저자 빅토리아 판레이는 과거 장인들의 물감상자에 담겨 있던 색의 원료를 찾아 긴 여행을 떠난다. 에바 헬러가 청금석의 산지로 막연히 말한 중동은 바로 탈레반 점령지역이었던 아프가니스탄 분쟁지역이었다. 판레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최고의 청금석 광산을 찾아가서 우리에게 생생한 현장을 보고한다. 청금석이 채취·가공·유통되는 현장과 그 역사에 대해 두루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준화된 화학염료 사용이 일반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19세기 중반 화학염료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가장 아름다운 색, 가장 완벽한 색을 얻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좋은 염료는 해상무역의 가장 중요한 품목 중 하나였으며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이 이어졌다. 아름다운 안료를 만드는 방법은 장인의 숨겨진 비법으로, 지금은 전승되지 않는 것이 태반이다. 청자의 아름다운 색을 내는 비법이 전승되지 않은 것처럼. 명장 스트라디바리가 바이올린에 바른 오렌지빛 니스는 아름다운 광택감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소리의 울림과도 관련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 비법은 전수되지 않아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화가들의 노력도 눈물겹다. 흰색 배경 위에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린 제임스 휘슬러는 작품을 완성하고 병들어 눕는다. 그가 원했던 완벽한 흰색에는 많은 납 성분이 들어 있어 건강을 해쳤던 것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색이 있다. ‘색채 실어증’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색을 표현하는 언어는 부족하다. 1675년 뉴턴이 프리즘으로 빛을 분석해 색의 영역을 일곱 가지로 나눔으로써 요즘 같은 색 체계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무지개는 정말 일곱 가지 색일까? 빨·주·노·초·파·남·보라는 뉴턴의 무지개색 분류는 옳은 것일까? 에스키모는 무지개를 다섯 가지 색으로 본다고 한다. 뉴턴은 ‘7’이라는 숫자에 집착했다. 일주일도 7일이고, 음계도 7가지다. 뉴턴은 빨강과 노랑 사이에 주홍을, 파랑과 보라 사이에 남색을 끼워넣어 일곱 가지 색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분류에 대해 뉴턴 자신도 혼란스러워 했지만 세상과의 조화를 위해 뉴턴은 결국 ‘7’이라는 숫자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색 분류는 무수히 많은 색을 정리하려는 노력의 하나일 뿐이다. 동양권에서는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한 오방색(황·청·백·적·흑)이 기본 관념이다. 이재만의 『한국의 전통색』(일진사, 2011, 2만5000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오방색에 의한 정색과 간색, 잡색 등을 다양하게 사용해 왔다. 뚜렷한 사계절의 자연환경 덕분에 우리 민족은 다양한 색에 대한 감식안이 발달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 제2차 시안’에 따라 그가 정리한 색은 무려 90가지에 이른다. 90가지 색의 이름만 들어도 황홀하다. 호박색, 추향색, 주홍색, 담주색, 선홍색, 연지색, 훈색, 분홍색, 진홍색, 흑홍색 등 적색 계열만도 21가지에 이른다.

또한 무채색인 흰색도 백색, 설백색, 지백색, 유백색, 소색으로 나누어 즐길 줄 알았다.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이유였다. 여기에 나열된 색들의 미묘한 차이를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제시된 자료를 보는 수밖에 없다. 책은 한국의 자연환경과 복식, 규장 문화, 전통 공예 등 다양한 문화유산에서 찾아낸 이미지를 보여주어 색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가 지나면서 새로운 색감이 생겨났다. 자동차 등의 번쩍이는 금속, 매끄러운 플라스틱, 작열하는 인공조명, 컴퓨터 모니터 등이다. 이런 현대적인 색감의 발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는 홍경택이다.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컬러리스트다. 홍경택을 통해 우리 미술은 1980년대 무채색 중심의 단색 회화였던 모노크롬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현대적 파스텔톤의 캔디컬러를 포함해 다채로운 중간색들을 사용한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색에 대한 감식안 DNA가 그에게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세련된 보색대비, 난색과 한색의 재기발랄한 배치로 ‘시각의 쾌락’의 한 정점에 도달한 그의 작품은 짜릿한 색의 축복이다.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 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러시아 미술사』『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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