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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외환은행장 "현대 실타래 푼 시장의 힘 절감"

중앙일보

입력

“은행장은 3디(D)업종이다.하루 종일 결재를 하는데,엔돌핀이 나오는 안건은 하나도 없다.”

김경림(金璟林)외환은행장의 푸념이다.그는 부산은행장에서 외환은행장으로 옮긴 직후부터 석달째 한국의 최대 재벌 현대그룹과 씨름을 벌이고 있다.때론 달래고,때론 윽박지르면서 지난 13일 두번째 자구계획까지 이끌어냈다.“시장이 나를 움직였고,현대를 변화시켰다”는 그의 현대 조련기(操鍊記)를 들어본다.

-외환은행장을 맡은지 1백일쯤 지났다.
“지난 5월19일 은행장을 맡았으니 석달이 지났는데,3주 혹은 3년이 지난 것 같다.너무 바쁘다보니 3주 밖에 안된 것 같기도 하고,현대관련 업무로 시달린 정도를 따지면 3년은 된 느낌이다.”

-현대측 2차 자구책의 핵심인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현대차 지분 매각과 현대차 계열분리 신청이 끝났다.이 정도면 현대사태가 일단 마무리된 것으로 보나.
“채권단이 중시하는 기준은 크게 두가지다.첫째는 이번 현대사태를 촉발한 현대건설의 재무구조가 확실히 개선되는가,둘째는 현대그룹이 약속한 날짜에 계열분리를 이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는 2차 자구계획만 성실히 이행한다면 해결될 것으로 본다.鄭 명예회장의 자동차 지분 매각대금 2천억원이 이미 지난주 현대건설에 지원됐고,9,10월 중엔 현대건설이 보유중인 현대상선과 현대중공업 주식도 매각할 것이다.사업용 부지도 팔고 이라크 공사대금도 일부 회수하면 연말까지 현대건설의 부채는 4조원 수준으로 줄어들 것으로 본다.

그 정도 부채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현대건설의 올해 매출예상액은 6조5천억원,영업이익은 4천5백억원쯤 되는데,장사해서 번 돈으로 이자는 감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현대차 계열분리는 9월 초면 정식 승인이 날 것이고,현대중공업도 예정보다 최종 시한을 1년반 앞당긴다고 볼 때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해결될 것이었다면 지난 5월말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가 처음 터졌을 때 채권단이 좀더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석달이 지연되면서 현대나 채권단이나 불필요한 코스트를 부담했던 게 아닌가.
“5월말 1차 자구책 발표를 시장이 신뢰할 것으로 믿었다.그런데도 계속 현대에 대한 불신이 제기되면서 2금융권을 중심으로 회사채나 기업어음(CP) 만기연장이 안돼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다.

채권단이 당시 현대를 너무 봐줬다고 하는데,사실 그렇지는 않다.그때 현대건설로부터 보유중인 계열사 주식에 대해 처분 위임장을 받았는데,이건 어려운 양보를 받아낸 걸로 봐야 한다.실제로 2금융권의 만기연장이 안되자 그 주식중 1천3백억원 어치를 팔기도 했다.”

-현대가 과연 채권단과 정부의 요구대로 자구책을 성실히 이행할 것으로 보는가.
“현대와의 협상을 각각 5월말과 8월말에 두번 치렀는데 현대측 자세가 많이 달라졌다.1차 협상 땐 사실 ‘정부와 주거래은행만 도와주면 풀릴 수 있는 문제 아니냐’는 안이한 태도를 보였다.하지만 실제로 어음 만기연장이 안되고,해외에서 공사를 따도 자금조달이 되지 않는 상황을 겪으면서 생각이 달라진 것으로 본다.여론의 비판도 심했다.

그래서 두번째 협상에선 현대 관계자들에게 ‘우리 요구가 단지 주채권 은행의 요구라고 보느냐,아니면 시장의 요구냐.아직도 정부와 주거래은행만 도와주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부터 던졌다.이번에 鄭 전 명예회장이 자동차 지분을 팔아 현대건설을 지원한 것도 현대가 시장의 힘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여전히 현대사태 해법에 의구심을 제기한다.예컨대 현대건설을 은행관리 체제로 넣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에 대한 불신 때문에 나온 얘기일 것이다.문제는 현실성이다.과거 은행이 자금관리단을 기업에 파견했었는데,해당 기업이 ‘이제 부도위험은 없어졌다’면서 은행에 마냥 의존하는 도덕적 해이 현상이 빚어져 대부분 실패했다.

게다가 건설업은 사업현장이 널려있고 자재·노무 등의 문제가 복잡해서 우리 은행 직원 전원이 매달려도 파악이 어렵다.주거래 은행이 기업의 현금흐름을 따지면서 간접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용근(李容根)전 금감위원장이 거론했던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모기업이다보니 그룹 전체의 생사가 얽혀있다.문제가 다르다.계열분리가 아직 안된 상황에서 너무 위험한 방안이었다.”

-일부에선 굳이 한국 최고의 그룹인 현대를 쪼개 전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있는데.
“현대가 98년말엔 계열사 숫자가 57개나 됐다.이번에 자동차 계열이 떨어져 나가면 25개로 줄어든다.하지만 소그룹이라고 볼 순 없다.분리되는 자동차 그룹이 당장 재계 서열 5위는 되고,정몽헌(鄭夢憲)회장 계열도 10위안에 든다.

2003년 이후엔 몽헌회장 계열도 건설,전자,금융으로 쪼개져 그룹이 5개 분야로 전문화되는데,이후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지는 앞으로 경영을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3부자 퇴진과 문제 경영인 퇴진 등 인적 청산도 협상과정의 주요 이슈였다.
“사실 은행장 입장에서는 문제가 생긴 거래기업이 재무구조 정상화되고 장사 잘해 은행 수익을 올려주기만 하면 그만이다.인사문제에는 관여할 필요도 권한도 없다.다만 3부자 퇴진 약속은 은행 요구가 아니라 현대 스스로 밝힌 것이다.문제 경영진 거취도 현대측이 자구계획에 밝힌대로 조만간 해결될 것이다.”

-이시점에서 현대사태가 남긴 의미를 정리한다면.
“현대사태는 비단 채권은행과 현대그룹 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그룹이나 시장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다.대외적으론 국가신인도가 좌우되는 판국이었다.나는 현대사태를 비단 은행과 현대 둘만이 사는 윈윈게임을 넘어서 시장과 대외 신인도 등 모두를 살리는 올 윈(all win)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나마 사태를 풀어준 가장 강력한 힘은 정부도,은행도 아닌 시장이었다.현대사태야말로 이제 시장의 힘이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존재라는 점을 입증한 것으로 본다. ”

-현대도 그렇지만,외환은행도 경영면에서 자구노력이 필요한 상황인데.
“그렇다.외환은행도 감독당국으로부터 경영개선권고를 받아 경영정상화가 시급한 상태다.잠재부실을 털다보니 9.65%였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8.0%로 떨어졌다.대형은행은 BIS비율이 10%는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앞으로 증자를 포함한 자구노력에 전력을 기울이겠다.”

-다른 은행과의 합병이나 금융 지주회사 편입 설도 끊임없이 나돌고 있다.
“외환은행이 흡수합병된다느니 강제로 정부 주도의 지주회사에 편입된다느니 뜬소문도 많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외환은행은 기업금융이나 국제금융에 강점이 있는데다,대주주인 코메르츠방크로부터 리스크관리 등 선진금융기법도 전수받은 우수한 은행이다.일단 재무구조를 튼튼히해서 독자생존 발판을 마련해놓은 뒤 우량은행과 대등한 입장에서 합병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담=손병수 경제부장

신예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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