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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리에서 늘 주인 노릇을 하라”던 임제 선사의 길 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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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원철
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초저녁에 부음을 듣고서 황망함을 이기지 못한 채 밤새도록 뒤척이며 비몽사몽간에 새벽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함께 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혼잣말과 동시에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습니다.

 흔히 ‘공부머리’와 ‘일머리’는 다르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머리라고 해서 일만 하며 살 수 없고, 공부머리라고 해서 공부만 하고 살 수 없는 것이 사바세계의 현실입니다. 나 역시 일머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공부머리도 아니지만 어른스님과의 인연은 새삼 나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결재서류를 들고 당신 방을 찾을 때면 필생의 역작인 불교사전 원고를 매만지고 있는 모습을 접하곤 했습니다. 팔순 가까운 연세에도 안경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만큼 늘 정정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인기척에 보고 있던 교정지를 밀쳐놓고선 능숙하게 행정서류를 일별하시고 처리지침과 함께 도장을 찍어주시곤 했습니다. 보고가 끝난 후에도 실무자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미심쩍은 부분은 꼭 다시 물어서 다시 한번 확인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급기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묻고야 말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책 원고에 전념하시다가 중간휴식 없이 바로 행정서류를 보시는 것이 가능하신지요?”

 공부머리에서 일머리로 당신이 원할 때 마다 수시로 모드전환이 가능한지를 여쭙는 당돌한 질문이었습니다. 자상한 미소와 함께 “가능해!” 라는 망설임 없는 답변에 저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과 공부의 전환 사이에는 누구나 거치기 마련인 여과과정을 생략할 수 있는 내공이 너무 부러웠던 까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세속적인’ 재무회계 서류를 들고 서 있는데, 가장 ‘성스러운’ 계율 파트인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 번역을 책임지고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모드전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당분간 공부머리는 접어 둔 상태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한국전통사상총서’라는 13권짜리 전집 기획물 가운데 한 권을 겁 없이 맡았습니다. 드디어 나도 일머리와 공부머리의 수시변신이라는 신통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생활은 늘 한결 같았습니다. 조계종 총무원 일과를 마친 후, 저녁엔 언제나 가산연구원으로 다시 출근 했습니다. 이어서 밤늦게 도착한 정릉의 경국사 숙소에서도 잠을 잊고 남은 일을 처리했습니다. 오가는 길에 시간을 쪼개 걷기운동을 통하여 건강을 챙기는 수시 모드전환형 이셨습니다. 임제(臨濟) 선사의 말씀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신 삶’이었던 것입니다.

 지관 어른스님! 어쨌거나 다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생사(生死)까지도 수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은 일부러 보여주시지 않아도 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감당하기에는 남아있는 모든 일이 너무 버거운 까닭입니다.

원철 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원철 스님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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